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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과 북스테이, 아-해피엔딩이냐고요? 아뇨.

책방으로 도피한 20대 후반 여자의 내일 - (5) 국자와 주걱(강화)

by 라화랑

"화랑님! 어땠어요?"


-으아아아아악!!! 네 사장님! 계셨어요? 어머 세상에…


깜짝 놀라 소리를 바락 질렀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더욱이 책방 사장님일 줄이야. 좀 감동인데, 진짜 감동이긴 하지만 불편하다. 는게 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뭘 이렇게까지 날 신경쓰고 그래요 사장님!


"오늘 맞는 손님들이 여자 3명이고, 화랑님이랑 나이가 같애. 근데 걔네가 알고보니 목요일에 왔던 사람들이라네? 저 아시죠? 하는데 어우 난 솔직히 모르겠더라고. 내가 원래 사람을 잘 기억을 못해. 으항항."


-어, 저 그거 좋아요. 사장님.

전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거 정말 싫거든요.


"뭐? 그게 뭐야?"


-전 그래요. 기억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평범하게.



어제 잠시 나눴던 대화를 잊으셨나요! 사장님이 나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진짜 혼자서 잘 수 있겠냐고. 자신이 정말 같이 안 자줘도 되냐고. 다른 손님들은 무섭다고 함께 자 달라고 했던건가, 그런 손님이 어떻게 이런 책방까지 찾아올 수가 있는건가, 더 이상한 사람들 아닌가 생각을 표정에 숨기지 않으며 정말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진심입니다 사장님. 그제서야 잘 자라며 나를 놓아주었다.


남의 집에서 그래도 화장실을 최대한 깨끗하게 써야지, 그러니까 샤워는 패스해야겠다 생각했던 1시간 전의 나는 추위에 굴복하여 들어가자마자 제일 뜨거운 물을 왕창 몸에 끼얹었다. 승화님, 제가 진짜 죄송한데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거든요. 나갈 때 깨끗하게 잘 할게요. 저 좀 봐주세요.

개운하게 씻고 미안해하는 사람치고는 대담하게 부스럭거리며 드라이기도 찾아 야무지게 머리를 말린 뒤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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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들었다. 일어나니 알람이 울리기 전이었다. 밖에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 주인이 왔는데 문이 잠겨져 있어 서성이는 건가, 걱정이 되어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커튼을 걷었는데 다행히 주인같은 사람들은 없었다. 9시에 아침을 먹으러 오라는 사장님의 말이 기억나 간단히 씻고 짐을 모두 챙긴 뒤,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 혹시 저 안녕하세요가 그 안녕하세요인가? 싶은 우렁찬 남자 목소리가 왼쪽에서 들렸다. 고개를 틀었더니 카페 문 앞에서 나에게 손을 흔드는 20대 중반의 남성이 보였다. 아, 승화님 친구분이시구나, 싶어 괜히 반가웠다.


-네, 안녕하세요~


가볍게 목례하며 눈 맞춘 뒤, 가벼운 걸음으로 다시 책방에 내려갔다. 부엌에 들어갔더니, 모르는 여자 4명이 이미 밥상 앞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3명이 한 무리인 듯 재미있게 떠들고 있었다. 1명은 함께 앉기는 했지만 떨어진 물컵의 거리만큼 마음의 경계선이 확실하게 보였다. 저 사람도 혼자 왔나 보다. 괜히 선배 티를 내고 싶어 사장님에게 먼저 커피를 내려도 되냐고 물어본 뒤, 능숙한 체 하며 커피를 갈아 내렸다. 나, 너네보다 하루 선배야- 크흠. 오늘 아침은 어제와 비슷한 샐러드 뭐시랭이와 계란국, 나물 몇 가지였다. 풀떼기들이 나에게 외쳤다. 이게 바로 도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힐-링-푸드 아니냐고. 나는 귀와 입을 막고 그 중 간이 센 청양고추 장아찌에만 손을 댔다. 대화는 없었다. 나무 숟가락과 국그릇이 부딪히는 소리, 가끔 나오는 '맛있다-', '음-' 소리. 혼자 먹다가 여럿이서 먹으니 젓가락질이 한층 조심스러웠다.

여자들끼리만 아는 밥상머리 예절이 있다. 가령 내 눈 앞에 하나만 남은 저 두부무침은 이름표가 없어도 내 것이 확실하다. 다들 한 개씩 가져가는 걸 봤기 때문이다. 저 두부는 내가 건드리지 않는 이상 아침상에서 선택받지 못하는 신세이다. 그런 식으로 모든 음식을 인원 수대로 케이크 자르듯 마음의 선을 긋는다. 몰랐던 시절도 있다. 이 여자들끼리의 암묵적인 음식 규칙을 몰랐던 중학교 1학년 시절, 나는 떡볶이의 야끼만두를 누가 몇 개 먹었느냐며 캐묻는 형사들의 은근한 취조를 당했다. 범인은 말이 없다. 왜냐하면 우발적 범죄였으니까! 몇 개 먹었는지도 기억을 못해 어버버거리자, 옆에 있던 애가 말해줬다.


-화랑이가 만두 두 개 먹은 거 내가 봤어. 얘 맞아.


난 취조에 성공한 친구들보다 걔가 더 미웠다. 먹을 수도 있지! 하는 억울함 전에, 그렇게 자기들끼리 정한 규칙이 있고 그걸 자기도 알고 있으면, 내가 두 개를 집는 순간에 멈추라고 말을 해 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가만히 속으로 세고 있다가 잘됐다 하고는 일러바치는 그 모양새는 뭐냐고 진짜.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다정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사건이면서, 여자들 사이의 그 은근한 규칙성을 내가 몰라도 한참 몰랐구나 하는 반성의 사건이다. 그 후로 나는 여중-여고-여초과를 줄줄이 가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여자 넷이 한 밥상에 같은 음식을 두고 앉았을 때 규칙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내 눈 앞에 놓인 시금치도 가운데를 기준으로 눈대중에 점-점-점 실선을 긋는다. 그게 우리 사이의 할당량이다. 이 선을 서로 넘어오지 않도록, 눈치껏 자기에게 가까운 나물들을 야금야금 파 먹어야 아침 식사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다. 밥맛이 똑 떨어진다. 자연스레 젓가락에서 손이 내려간다. 그만 먹어야겠다 생각하며 내 밥 그릇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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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과 궁합이 잘 맞는 점은 내가 설거지를 하도록 놔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다. 손님이니까 내가 다 해줄게-가 아닌 내가 밥상까지 차려줬는데 치우는 건 인간적으로 니네가 해야지, 하는 당연한 태도로 날 쳐다본다.

그래서 내 마음이 편하다.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주면 난 그에 맞게 돌려줘야 직성이 풀린다. 남에게 기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설거지를 해도 고맙다는 말 하나 없지만, 사실 나도 고마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도 사장님께 아침 차려줘서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안 했다. 사장의 의무로 음식을 내왔고, 난 손님의 책임으로 설거지를 한다. 내 몫의 면책부가 있어 어색한 아침식사 자리에 숨통이 트였다. 난 엄연한 북스테이 선배니까 같은 속도로 식사를 끝마친 손님 한 명의 설거지는 내가 해 주기로 했다. 물론 말은 없다. 생색내면서 눈에 띄고 싶지는 않으니까. 자연스레 그릇을 주방에 가져가며 그 사람 몫도 같이 들고 갔다. 3분 남짓한 간단한 설거지를 마치고 뒤를 돌자, 쭈뼛거리며 눈을 맞추는 여자가 있다.


"저, 제 그릇 설거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정하고 차분한, 공기가 섞인 목소리다. 나는 엇, 네 하고 마당으로 나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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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는 여전히 요리가 야외 나무 테이블에 누워 기지개를 펴고 있다. 곧 잠이 들 모양새다. 괜히 방해될까 그 앞에 있는 철제 테이블과 세트인 의자에 앉아 요리를 멍하니 쳐다봤다. 등 따숩고 햇빛이 짱짱하니, 기분이 좋구만. 공기도 산골짜기라 괜히 상쾌하다.

나도 요리와 다를 게 없었다. 책방 주변을 요리조리 산책하다가 기분 내키면 들어와서 책도 좀 뒤적거리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면서도 등을 비비고 내게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았던 이틀이었다. 고양이 팔자로 살아보니 배가 따땃한 기분이다. 뜻뜨미지근한 몸뚱이로 식빵을 굽는 방법을 배우면 좋으련만. 더 있고 싶지만 오늘은 일요일 아침이다. 꿈에서 깰 시간이란 뜻이다. 도시로 다시 나가려면 나는 남들 눈을 또 신경쓰겠지- 그런 날 포장하기 위해 화장품을 몇 개 꺼냈다. 요리야, 넌 귀엽게 타고나서 참 좋겠다. 생각하며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있었다.


대문이 열리더니 웬 웰시코기 두 마리가 헥헥거리며 마당에 입장했다. 활력이 넘치는 혓바닥이 쉴 틈 없이 학학거렸다. 화장품을 든 채로 위를 쳐다보자, 강화도 시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퍼런 눈의 남자 외국인이 서 있었다. 개화기 때 처음으로 외국인 선교사를 본 것 같이 당황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 남자가 물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주인 명옥씨 있어요? 어디 있어요?}


-아, 사장님이요. 사장님 아마 주방 안에 있을 거예요. 저기요.


{아 고마워요. 명옥씨-}


라이더자켓에 선글라스를 쓴 금발 외국인이 찾는 이 명옥씨는 내가 알던 사장님이 맞는가. 이 시골짝에 별 사람들이 다 드나든다 싶어 실소가 터져나왔다. 도시였으면 쉽게 숨겼을 표정이지만, 이미 모든 것을 나 혼자 있는 듯 드러내고 있는 나였기에 허허 웃음을 터는 나를 그 외국인이 다시 한 번 맞이했다. 주방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새 사장님이 어디로 간 모양이다. 다음에 다시 오겠다며 잡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전형적인 외국인이 사라졌다. 한옥 문을 끼익 닫고 말이다.



여긴, 마지막까지 대체 뭐 하는 데람?


터가 좋은 거야, 안 좋은 거야 이건!

내가 심심할 구석을 주지 않는 건 확실하다.


[아, 외국인? 로윅인가보다. 그 나 때문에 여기로 이사한 일러스트 작가가 있거덩. 근데 그 사람 남편이야. 둘이서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다가 만났대. 우리 책방 오는 길에 교통사고 났던 그 작가 남편. 자기 아내 병원에 입원해서 심심했나 보네. 만나러 오는 거 보니까?]


-그렇구나. 저 분도 작가예요?


[로윅?아니 로윅은 음악해. 기타도 치고, 다른 악기도 잘 다루는데. 명상 음악인가? 그거 하더라고. 엄청 신기해 그거! 막 왕-왕- 거리면서 예쁜 그릇 같은 거 있지? 그런거 문지르고 흔들고 그런 음악 자기도 알아? 그런거 하더라고.]


서점에 돌아온 사장님께 외국인이 왔다 갔다, 사장님을 찾더라-는 말을 전해 주고 나서 외국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어쩐지 범상치 않을 것 같더라니, 이 시골에 누가 그렇게 멋드러지게 선글라스에 옷을 빼입고 강아지 산책을 나서냔 말야. 명상 음악을 한다니까 이유는 없지만 모든 차림새가 설명되는 기분이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제 돌아가려고요.


[어, 지금 가게? 가만 기다려봐요. 어떻게 가려고?]


-보니까 걸어서 10분 거리에 버스 있더라고요. 거기서 다른 책방도 가보려고요. 시점이요.


[아아, 거기? 맞아요. 버스가 11시에 있으니 좀 더 있다가 …]


-아니요, 천천히 걸어가면서 주변 구경할게요. 빨리 도착하면 해도 좀 맞고, 멍 때리죠 뭐.


[그래요? 그래 그럼.]


무거운 짐을 어깨에 다시 들쳐멨다. 어째 더 무거워진 기분이다. 돌아갈 길이 막막하리만치 멀어서 그런가. 대문을 나서 갈림길에 오를 때까지 사장님이 나와 함께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사장님이 걸어가는 나를 얼마만큼 쳐다보고 있다. 더 뒤돌아보지 않아도 되겠다. 갈림길을 돌아 네이버 지도를 켜서 길을 찾는다. 밤에 차로 들어오느라 몰랐던 길들이 눈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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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꽃나무야. 잘 있어.
또 올게.
승화님, 여기서 건강히 잘 지내요! 고마웠어요.
안-녕-히-계-세-요!
사장님, 이만 들어가세요. 저 괜찮아요.


마음 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어깨가 무겁지만, 멜 힘이 있다.

가고 싶은 곳이 생겼기 때문이다. 책방이건, 글쓰기건. 사실 아직 도시의 내 자취방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가야 한다. 또 여기를 오려면 견뎌야 하는 시간이 있다. 버겁지 않게 강화도의 꽃과 나무가 나를 잘 견뎌주었다. 나도 도시의 시간들을 꽃나무처럼 잘 견뎌내겠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20분 남았다. 멀거니 국자와 주걱으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를 쳐다보았다. 저 안에서 내가 이만큼 힘을 얻을 거라고, 도망칠 때에는 상상조차 못했는데 말이지. 저 산골짜기가 내 생명을 구할 줄이야. 얼마간 다시 살고 싶다- 잘 사는 것 말고 그냥.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 하고 싶은 걸 찾았으니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글도 둘 다 꼭 붙들고 싶다. 잡을 힘이 없을 때, 잡히고 싶지 않을 때 다시, 여기로!


살아보자 나! 수고했다 나.


버스 온다, 이거 타자.

날 사랑하기 위한 첫 걸음에 만족한다. 다음 도망지는 미리 정해뒀다. 오늘 가는 책방 시점은 잠시 지나가는 뜨는 동네라 나랑 안 맞는다. 다음주는, 이천이다.

다른 장소로 가기 전 버릇이 있다. 뒤를 그렇게 돌아보며 나를 시험한다.


여기를 떠나 다른 데로 가면 좋은 거 확실해? 지금 네가 찾은 곳이 딱이잖아. 뭐 하러 힘들게 다른 곳을 또 찾아가. 여기 좀 더 즐겨!





뭉근한 몸짓으로 나는 마지 못해 스스로를 모험에 빠트린다.

더 나은 내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나를 꼬신다.


다음주 북스테이는 더 좋을 거야.

네가 지난 주의 그 상태가 아니니까 말야.

적어도 최악은 아닐 거란 뜻이야.



좀 더 해보자, 그래.








강화 국자와 주걱(5/5) 끝.


우울의 시작이면서도, 얼마나 스스로 나빠졌는지 모르기에 어두컴컴한 글이 써지기 시작했던 4월입니다.

이를 끝까지 견뎌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장소는 4월 중순의 경기도 이천 북스테이, '오월의 푸른하늘'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다음 장소에서 뵙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온 마음 담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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