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방들도 비슷했다.
다들 침대 하나와 책상, 자신이 만든 여러 미술 작품들, 그리고 '엄마 아빠가 많이 사랑해, 우리 아들'같은 글귀가 적힌 가족사진이나 '자랑스러운 우리 가족'이라는 글귀 밑에 활짝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담긴 십자수 쿠션같은 것들이 방 한 켠에 꼭 있었다. 어떤 방은 천장에 야광 별 스티커가 무더기로 붙어 있었으며, 어떤 방 한 쪽 벽은 직접 칠한 듯한 노란색 페인트로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예쁜 엽서들을 덕지덕지 붙인 방도 있었다. 방 3개와 거실 하나, 세탁실 하나, 화장실 하나, 그리고 문이 닫힌 방 하나가 이 기숙사의 구조였다. 냉장고에는 음식이 아예 없이 텅 비어있었다. 깜찍한 글귀가 노란색 색지에 프린트되어 붙어있었다.
출근 전 체크리스트-
1. 손 씻기
2. 세수하고 샤워하기
3. 머리 위에 모자쓰기
4. 손톱 발톱 정리하기
5. 옷 입기
6. 양말 신기
*약 먹어야 할 것 : 승화 - 3개 (선생님 방 책장 속에 있음), 두식 - 4개 (선생님 방 책상 아래)
문 닫힌 방이 선생님 방이구나, 절로 생각하게 되었다.
짐을 내려놓고 잠시 책방에 들렀다. 어제 읽으라며 빌려주신 책을 반납해야 하나, 고민했기 때문이다. 사장님이 날 보자마자
"저녁 먹어야지. 어떻게 먹을거예요?"
하고 묻는다.
-어, 저녁은 원래 알아서 먹는 거 아니었어요? 저 라면도 사왔고 과자도 있어요. 알아서 잘 먹어요.
"내가 미안해서 그렇지. 저기 위에 올려다놓고. 어, 혼자 온 손님이 또 있는데, 거기는 내가 된장찌개 맛있게 하는 집을 하나 소개시켜 줬거든? 그랬더니 먹으러 갔다가 저기 오네. 꼭 내가 알려준 길로만 다시 돌아오네. 내가 너무 자주 먹는 데가 하나 있거든. 저기 오른쪽으로 꺾어서 논밭 저길로 갔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큰 길이 나오거든? 그러면 한 5분 걸려요. 아무튼 내가 진짜 좋아하는 집이야. 응, 그래서 화랑님은 저녁 뭐 하고 먹을거야? 어떻게 할 건데?"
-아, 거기 가볼게요. 알려주신 대로. 저 그리고 이제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아니, 원래는 그런데 내가 미안해서 그렇다니까. 그 카페에 있던 손님중에 젊은 커플 못 봤어요? 맞아요, 거기가 그 카페에서 일하는 형 동생인데, 이번에 여자친구를 데려왔더라고. 그래서 그 집이 사실 우리 집 윗 옆 집인데, 나보고 고기 먹으라고 올라오라네? 근데 나는 손님 왔다고 하고 화랑씨랑 같이 된장찌개 먹으러 가도 괜찮아. 같이 먹으러 갈까 지금?"
이 사장님, 드디어 미안하다는 말을 저렇게 행동으로 하시려고 하네.
우리 만약 고등학교 때 만났다면 제가 고 3때 즈음에 폭발해서 절연했을 것 같아요. 그 전까지는 사장님이 하자는 대로 다 하다가요. 아, 왜 이렇게 잘 아냐고요? 저 사장님 같은 친구랑 고 1부터 고 3까지 가깝게 지냈거든요. 결말은 제가 방금 말한대로고요. 이런 류의 사람들과 가까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스물 몇 살이 되어서야 알게 됐지 뭐예요. 바로 이렇게 말하면 되더라고요.
-사장님, 저 진짜 괜찮고 여기 혼자 있으려고 왔어요. 잠도 혼자 잘 자고, 혼자 밥 먹는 게 지금은 누구랑 같이 밥 먹는 것보다 더 좋아요. 사장님은 사장님 약속 가세요. 저는 밥 먹으러 지금 다녀오려고요. 그럼, 사장님이 말씀해주신대로 저 트랙터 보이는 논밭길로 가면 되는거죠?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저 이거 먹고 나면 카페에 재즈 콘서트 뭐 있다고 해서 가보려고요. 그러니까 오늘은 더이상 저한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대신 내일 필요하면 찾아갈게요.
"그럴래? 그러면 음, … 그러면 내일 몇 시에 일어나나? 내가 내일 아침 해줘야지. 9시 어때요? 9시에 와요. 내가 아침 부엌에서 해 놓을게요."
내가 필요한 말을 진솔하게 하는 것.
내 마음이 이래야 편하다는 것을 과하지 않은 표정으로 전달하는 것.
네 행동에 미안함이 깔려있다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
하지만 그 방식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
내가 꽁꽁 숨겨놓은 진실된 말을 가감없이 하는 게, 사장님 같은 분들을 위한 나만의 해결책이다.
본인이 미안한 일이 생겼을 때, 남이 이렇게 하면 좋아하겠지- 짐작해서 행동으로 표현하려는 분들과 그런 마음을 알고 있기에 더욱 배려하려고 내 불편함을 꽁꽁 숨기면서 속으로는 손절 라인을 긋는 꽁한 나는 상극이다. 답은 간단하다. 내가 폭발하지 않게, 스멀스멀 내 기운을 처음부터 뿜는 것이다. 내 스팀을 손에 만져보면, 뜨겁지 않은 미열에 알아서 서로 불편하지 않게 조심하더라고.
그래, 화랑아. 너 좀 표현하고 살아라. 도시에서도.
사장님이랑 말만 섞으면 자꾸 그렇게 하나씩 톡 까놓게 되는 게 생긴다. 난 또 그렇게 한꺼풀 벗겨진다.
이러다 누드 되겠어?
뭐, 누드도 나쁘지 않지. 생각보다 시원할지도!
가면을 쓴 화랑이와 가면 안의 화랑이가 대화를 나누며, 밥집을 찾아간다. 걸어서 10분 안쪽에 있는 한식집이었다. 생각 없이 된장찌개를 시켰다. 몇 술 뜨고 또다시 깨달았다. 난 건강식을 정말 싫어하는구나. 10가지 나물이 똬리를 틀듯 요염하게 앉아있어도 내 젓가락은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 한다. 결국 반 넘게 남기고 재즈 콘서트 시작 시간인 7시에 맞추어 일어났다. 제법 쌀쌀해지는 저녁 기운에, 발길을 서둘렀다. 7시가 조금 넘어 도착했다. 카페 앞에 주차장이 처음으로 가득찼다. 조심스레 들어가자, 또다시 밝게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새로운 알바생이 계신다. 아, 저 분 발달장애구나. 이제서야 좀 더 보이네. 마주 인사를 하고, 낮에 앉지 않았던 유리중문 너머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큰 스크린 화면이 벽 한 면을 메웠다. 공간에는 열두 명 남짓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큰 소리 없이, 조곤조곤 자신의 짝들과 이야기를 한다. 나 빼고는 다 50대 중반에서 60대까지의 부모님 나이대였는데 그 중 양갈래로 머리를 예쁘게 땋은 회색 머리 아주머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수줍은 웃음이었다. 진심으로 이 시간을 기다린 사람의 표정. 공간에는 웅산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가 울리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왼쪽 팔목을 팔걸이에 걸치고 턱을 받쳤다. 눈을 살짝 감아보았다. 잘 들리지 않던 가사가 귓가에 쏙쏙 박힌다.
[더 외로워 너를 이렇게 안으면
너를 내 꿈에 안으면 깨워줘
이렇게 그리운걸 울고 싶은걸
난 괴로워 니가 나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만
우고 사랑을 말하고 오 그렇게 싫어해 날
난 욕심이 너무 깊어 더 많은 걸 갖고 싶어
너의 마음을 가질 수 없는 날 슬퍼
.
.
.
너에게 편지를 써
내 모든 걸 말하겠어]
나네.
나다.
가면 안에 있는 화랑이다.
이 노래를 원래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불쌍한 애가 짝사랑하는 사람한테 매달리는 노래로 알고 있었을 뿐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노래를 들으니, 내 얘기가 맞다.
나를 알려고 노력했다.
근 1년간은 더욱. 내 취향을 찾겠다며 미술 작품 관람회같은 다양한 일회성 소모임에도 가보고, 혼자 다이어리 스티커 파는 곳 투어도 다녔으며, 혼술 가게도 찾아다녔다. 나같은 길 잃은 청춘들이 모인 디지털 디톡스 안식일 이벤트도 참가하였다가 거기서 만난 커뮤니티 리더와 나를 진정 알아본다며 외국 드라마에서나 보던 소셜 살롱에도 갔다. 다들 둥그렇게 앉은 꼴이 알콜 의존증 치료자 모임 같았다. 거기에 앉아서 다들 외로움과 스스로의 방황 서사를 풀어내고, 잘될 거라며 토닥이는 꼴이라니, 그 안에서 내가 진정으로 동질감을 느꼈을 리 없다. 이 시덥잖은 원에 내가 껴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을 뿐.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나는 더욱 외로워졌다.
1년동안 행했던 모든 노력이 나를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걸 찾을수록, 나는 더 미궁에 빠졌다. 점점 싫어졌다. 일회성 만남을 전전하며 하루의 감성을 얻어려는 얄팍한 술수를 쫓아다닌 내가 바보같았다. 그렇게 모든 새로운 경험들이 나에게 화살로 돌아와 찔렀고, 나는 나를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내가 뭘 원하는 지도 모르면서 발 살짝 담궈보고 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 내 욕심 상자는 가슴에 큰 구멍을 냈다.
밑독이 빠진 구멍은 채울 수 없었다. 그러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친절하고 배려깊었다. 1년동안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며 카카오톡으로 개인 연락을 해 오기 일쑤였으니까. 그러면 난 읽히지 않는 1을 보며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응, 너도 아니야! 난 너 때문에 얼마나 불편했는지 알아?' 아무도 나에게 그들을 위해 희생하라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날 쓱쓱 지우고 남의 기준으로만 채워놓으니 뭐가 될 리가 있나.
나는 한 번도 내 마음을 얻은 적이 없다.
한숨이 폭 쉬어졌다.
내 마음을 가질 수 없는 난, 슬프다. 그래서 오늘 말한다. 나에게 편지를 쓴다.
-나, 사실 많이 너 때문에 힘들었다. 되도 않는 인생 다 통달한 척 그만 했으면 좋겠다.
너 때문에 진짜 웃어본 지가 언제인지 생각도 안 난다.
소록소록 감상에 빠진 사이 노래가 끝났다. 정신을 차린 내가 눈을 뜨자, 앞에는 군색 벙거지 모자를 쓴 웬 아저씨 하나가 마이크를 잡고 서 있었다. 단발 파마 머리에 안경을 쓴 채였다. 방실방실 입가에 걸려있는 미소가 사라질 줄 모르는,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의 남자였다. 은은한 따스함이 눈가에서 느껴졌다. 문득 옆과 뒤를 돌아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잔잔한 호수처럼 일렁이는 행복감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들 웃고 있었던 것이다! 살포시 걸린 미소와 발그레한 볼, 초롱초롱한 눈이 다들 어찌나 예쁘던지 시들어 있는 나보다 30살은 더 많은 그들이 청춘 같아 보였으리라.
"저, 오늘 와주신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아. 저, 그러니까 오늘은 지난 시간 고전파아에 이어서, 제가 제일 좋아하느은, 리스트와 쇼팽으로 대표되는 낭만주의 피아니스트들의 곡을 들어볼 건데요오, 그 전에 들으셨던 곡은 웅산이라는 재즈 여가수가 부른 노래입니다아. 요새 사람들이 많이 힘들어요오, 힘든 사회인게 분명합니다아, 그래서 다들 위로가 필요한 시대인 만큼 이렇게 잔잔한 노래르을 틀어 보았습니다아. 다음 노래는 BEAUTIFUL LIFE 입니다아. 작은 것들에게서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노래입니다아.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유명한 재즈 가수이면서도 아직까지 어린이집 보육 교사를 같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아. 그만큼 평범한 행복을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가사를 유심히 들어보세요오."
저런, 일상의 행복같은 복에 겨운 소리 하고 있네.
내가 제일 부러운 부류구만. '먼 길 떠나오는 사람에게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알려줬으면-' 하는 노래 가사를 믿는 사람들 말이다. 자신의 행복을 확실히 알고, 매일 겪을 수 있다는 분명한 기준이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노래를 부른 가수의 목소리가 몸을 둥둥 띄우는 기분이 든다. 몽롱하게 잠시 구름의 요정들이 내 발을 간지럽혀 엉덩이가 조금 들리는 느낌의, 간질간질한 목소리였다. 아- 노래 조오타. 이런 노래만 나온다면 몇 시간이고 여기서 들어주마.
… 했던 나의 기대가 무색하게, 앞에 선 아저씨는 오타쿠가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동료를 만나 신나게 최애 작품을 은밀히 설명하듯 쇼팽과 리스트에 대한 온갖 노래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어렴풋이 들었던 노래, 영어 모의고사를 치기 전 볼륨을 체크하는 노래, 어디 고객센터 상담원을 기다리는 노래가 번갈아 흘러나왔다. 가끔 CF에 나오는 노래가 나오면 반갑긴 했으나 거기서 끝이었다. 강제 귀호강, 하지만 졸려 죽겠는 2시간이 흘러가고 나서야 아쉬운 듯한 아저씨의 "다음에 또 이어서 하겠습니다."라는 끝인사를 들을 수 있었다.
여기 어떻게 왔냐, 아는 사람이냐, 클래식을 좋아하냐 혹시 누가 물어볼 세라 어깨를 숙인채 땅만 보고 누구보다 빠르게 카페를 빠져나왔다. 으- 밤바람이 차다. 얼른 들어가야…
"화랑님! 어땠어요?"
강화 국자와 주걱(4/5) 끝.
여기까지 읽어주심에 감사드리며, 궁금하시다면 5편이 마지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