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울증과 북스테이, 텅 빈 남자 기숙사에서 자라고요?

책방으로 도피한 20대 후반 여자의 인사 - (3) 국자와 주걱(강화도)

by 라화랑

카페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 눈치가 보일 때에는, 빠르게 다른 메뉴를 시키면 된다.


이 자본주의적이고 간단한 진리를 사람들은 알면서도 모른척 넘겨 서로를 불편하게 한다. 혼자 이 자리를 차지한 지 한 시간이 넘었으니, 다음 커피를 시켜야겠다.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케이크 대신 빵이 몇 종류 유리장 안에 곱게 들어가 있었다. 소금빵, 치아바타, 먹물치아바타가 나를 쳐다본다. 응, 너네 안 먹어. 나 점심에도 사장님이 불러서 남은 연잎밥 먹으라고 보챘거든. 아까 산책 갈 때 안 그래도 소금빵 벌써 시켜서 들고 갔단 말야. 더는 물려서 못 먹으니까 나 유혹하지 마.


유리장 안의 빵들과 영혼의 교신을 하고 있었는데, 남들은 그걸 보고 '얘가 빵이 먹고 싶은가보다.'라는 걸 깜빡했다. 내 실수, 여기 와서 사회적 가면을 너무 벗어제꼈나.

[커피를 이렇게 많이 마셔요? 더 안 시켜도 괜찮은데, 빵이라도 같이 줄까요? 우리 소금빵 먹어봤어요?]


네, 저한테 파셨어요. 산책길 정보값으로요.

앞선 두 알바생과 달리 위풍당당한 표정의 숏컷 아주머님은 자신있게 빵을 권했다. 잠시 고민했다.


저기서 말한 같이 준다는 뜻은, 나한테 진짜 하나를 공짜로 준다는 말일까, 내 돈 주고 사 먹으라는 뜻일까? 뭐가 됐든, 둘 다 내 마음 불편한 건 마찬가지다. 정중하게 사양했다. 배부르다는 건 시덥잖은 핑계이다. 공짜로 주는 호의는 불편하다. 원하는 것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설령 내게 당장 원하는 것이 없다고한들, 상대방은 자신이 베푼 친절에 가치를 매긴다. 그리고선 나를 거기에 빗대어 본다. 난 빵 한 쪽짜리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거절했다. 물론 옛날에는 덥썩 받아먹곤 했다. 은근히 다가오는 시선들과 친절, 가령 '너 아침 안 먹은 것 같아서, 빵 좋아해?'라며 건네는 그 손에 생각지도 못한 게 걸려있는 남의 마음들. 내가 채워주지 못하는 기대를 몰랐을 때야 그렇게 하지, 남이 뭘 나를 통해 갖고싶은지 알게되는 이십대 후반은 오는 손 마다하는 칼의 여인이다.


-죄송합니다, 배 불러서요.

[어머, 아니에요~ 곧 음료 가져다 줄게요~ 여기 녹차 라떼 따뜻한 걸로 하나~]


죄송해요. 말투 끝에 음표가 달린 카페 사장님. 꼬일대로 꼬인 혼탁한 영혼은 여러분들이 주는 작은 호의도 벌벌 떨게 되었답니다. 당신의 탓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별 것 아닌 걸로 풍덩 부정의 바다에 다이빙하는 내가 싫다. 머리를 살살 흔들었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깊은 악몽을 흐트려놓는 나만의 의식이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문 앞에 떡하니 걸린 팻말이 보였다.

'15회 큰나무 음악회 - CLASSIC JAZZ, MUSICAL & CULTURAL EXPERIENCE’

밑에는 일시와 장소가 써 있었는데, … 오늘 저녁 7시네?

문득 어제 도착하자마자 고해성사를 쏟아냈던 책방 사장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메아리친다.



"아니, 나 정말 요새 정신을 놔두고 살아. 내가 책방을 원래 꼬박꼬박 안 여는 사람이기도 하고. 아주 불량하고 불성실한 사장이거든. 호호호! 내가 화랑님 문자를 보고 예약이 당연히 그래서 오늘도 다 없는 줄 알고 그래요, 와요. 하고 다 했는데, 이것 봐봐요. 내가 또 이렇게 몇 달전부터 이번 주 토요일에 받아놓은 예약이 있었네? 내가 이래요. 여기 달력 두 개를 동시에 쓰는 거야. 거기에 핸드폰 달력까지 3개니까 내 정신이 당연히 없지. 그래서 여기 토요일에는 두 팀이 더 들어와서 총 화랑님까지 3팀이야. 다 여자이고, 20대 후반이라네?

근데 이럴 때 내가 바로 위 카페에 손님을 보내. 거기가 침대도 있고 더 좋아. 지난번에 외국인 하나가 왔었는데, 바닥에서 자고는 죽어도 침대 아니면 못 잔다고 해서 거기 보냈었거든? 다른 손님들도 거기서 잔 게 여기보다 훨씬 좋았대. 그래서 내일은 거기서 자게 될 거예요. 괜찮아?"


그 때 내가 뭐라 그랬냐면,


-쫓겨나는 거 아니죠? 저 혹시 짐 싸서 내일 집 가요? 아, 아니에요? 저 여기서 머물 수만 있다면 다 좋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책방스테이도 좋지만, 당장 여기서도 제 갈 길이 없으면 길에서 자는 게 더 나은 선택지일 거예요. 아직 저는 도시의 삶으로 돌아갈 힘이 없거든요.


… 라고 했었지. 어차피 여기서 묵게 된 김에, 잘 됐네.


"저, 음악회는 혹시 어떤 식으로 진행되나요?"


내 말 한마디에 활짝 핀 꽃이 물을 받아 기운을 뿜듯이 또렷한 눈망울로 카페 알바분이 조잘조잘 이야기를 해주셨다. 전문가가 와서 관련된 이야기를 해 주고, 카페 음향 시설은 어디서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으며, 이 프로그램만 따로 찾아오는 팬도 있고, 입장료는 카페 이용값인데 손님은 벌써 3잔이 넘었으니 그냥 들어오시라고, 정—-말 좋은 시간이 될 것이며,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아, 네~ 시간이 되면 여기로 찾아오면 되는 거죠? 저 그러면 곧 뵐게요!

대답과 동시에 전화가 울린다. 국자와 주걱 사장님이다.

"화랑님? 짐 챙겨서 밖에 놔뒀어요."

와서 니 짐 들고 치워달라는 거구나.

예예, 갑니다 가요.


생각해보니 사장님은 자기가 예약 착각해서 여러 팀 받아놓고 나한테 미안하단 말 한 마디가 없었잖아? 내가 죽어도 싫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을까, … 신선한 경험이긴 하네. 자기 실수여도 사과하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하기. 습관적으로 욕 먹기 싫어서 '미안해'를 입버릇삼는 나는 좀 본받을 태도이기도 하고. 그 방패막이 나에게 공격화살로 돌아갔으니.


미안, 그만.

내가 지금 미안한 건, 돌보지 못해준 나다!

KakaoTalk_20230828_091843304.jpg

몇 번 가봤다고 벌써 카페 올라가는 길이 익숙하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이 밭을 지나가는 게 맞는 건지, 남의 집 앞을 이렇게 당당히 활보해서 카페로 올라가도 집주인들은 화내지 않을지 걱정했는데 5시간이 사람을 이렇게 바꿔놓을 줄이야. 짐이 담긴 에코백을 들쳐 메고 똑같이 생긴 세 집 중 한 곳에 사장님을 따라 입장했다.

펜션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카페의 음료와 빵을 만드는 청년들의 기숙사였다. 들어서자마자 10년 전, 오빠의 대학 자취생 시절 불쾌한 홀아버지 냄새가 나를 덮쳤다. 아, 남자들은 왜 다 같은 냄새가 나는 걸까? 인체의 신비다. 쿰쿰한 삼촌 냄새, 런닝만 입고 사는 사람들의 축축한 냄새. 다시 한 번 내가 방 한 켠에 쌓인 담뱃재가 들어간 페트병들을 분리수거 해야 할 것만 같은 불성실의 냄새. 저 영혼은 대체 뭐 하는 인생이 되려고 엄마가 과제 하라고 사 준 컴퓨터 앞에 앉아 내 핸드폰 전화는 무시하면서 화면 속 게임 친구들의 말은 소근거리는 작은 속삭임도 귀담아들으며 하루를 탕진하나, 내게 묻어나오는 걱정의 냄새.

"여기 카페가 발달장애인들이 하는 건 알죠?"


-네, 카페 벽에 붙은 포스터 봤어요. 빵들을 다 만드신다고.


"맞아요. 난 걔네랑 시간 맞으면 소풍도 같이 나가고 막 그래. 거기 젊은 친구들이 주중에는 여기 있다가 주말에는 집으로 가거든? 그래서 여기에 오늘 아무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자면 돼. 이 방이 가장 좋겠네."


-네. 그런데 만약 그 친구들이 갑자기 여기 들어오지는…


"만약 그런 데였다면 내가 여기를 화랑님한테 안 줬겠지?

아 참, 이 방 주인들 중에 한 명이 주말이 되면 책방도 왔다가 그 옆집에서 자거든? 만약에 여기 불이 계속 켜져 있으면 걔가 자기네 집에 누가 왔나 하고 길 가다가 들어올 수는 있어.

그래서 마주치면, 인사하면 돼. 안녕? 이렇게."


-아, 안녕이요?

"응, 안녕. 그럼 걔도 안녕하세요~ 할 거야."


아하, 앞으로 누가 내 집에 들어와 있으면 인사를 해야겠다. 안녕? 하고. 그럼 그 사람도 인사해 주겠지, 안녕- 이렇게? 쓰읍, 몇 살인지 모르는데 사진만 보고는 좀 더 나보다 어릴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초면이니까 안녕하세요가 더 나으려나. 사장님이 간단한 설명을 한 뒤 혼자서 잘 수 있겠냐고 다시 한 번 물어온다. 이 넓은 곳에 혼자 자는게 무섭지 않겠냐니, 그렇게 걱정되는 사람을 남자들만 쓰는 숙소에 넣어놓는다고요?


-사장님, 저 겁 없어요. 있으면 금요일 밤중에 여기 갑자기 오진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저 여기 혼자있으려고 왔어요. 그러니까 이만, 들어가세요.


에라 모르겠다. 일단 혼자 있고 보자.


겁나는 생각은, 건강할 때 더 하는거다.

밖에서 모르는 발달장애인이 원래 자기 집 안에 침입자가 궁금해서 들어오는 게 뭐가 무서워. 스스로 매일 쥐파먹고 방치하는 내가 안에 갇혀 있구만. 그냥, 나는 안녕-만 하면 되는거다. 진짜 닥치면. 그 상황이 닥치면,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야지. 만나서 반갑다고! 방 쓰게 해 줘서 고맙다고! 그럼 될 일인데 뭐.


남의 침대에 풀썩 누워 방을 살펴보았다. 2평 남짓한 방 안에는 싱글 침대, 드림캐쳐, 직접 그린 것 같은 미술 작품, 책상, 의자가 깔끔하게 위치해 있었다. 청소는 국자와주걱보다 100배 낫네. 바닥에 놓인 회색 플라스틱 바구니에는 잠옷, 드라이기, 세면도구 등이 정리되어 들어가 있다. 책상 위에는 로션과 이 방의 주인이 직접 그린 듯한 작은 꽃 그림, 다른 친구들에게 받아 예쁘게 코팅된 생일 축하 기념 롤링페이퍼가 있었다. 잠시 실례- 롤링페이퍼 안의 방 주인은, '승화'였다.


승화씨, 제가 몰래 방을 쓰고 가도 될까요? 비정한 돈의 세계란 이런거랍니다. 어떻게든 책임을 지고 수습하는 엉망진창의 하루같아요. 제가 여기에 승화씨 방을 쓰게 된 것 처럼요. 만약 제가 나쁜 사람이라서 승화씨 물건을 패대기치거나 훔쳐간다면 피해는 고스란히 승화씨가 받는 거잖아요. 아무것도 모른채로요.

전 안 그럴게요. 벌써 주인 모르는 침대에 누워 하루 자야 하는 게 미안해 죽겠으니까, 이불 접어놓은 각도까지 잘 맞춰서 다시 돌려놓고 나갈게요. 그나저나, 우리 이름이 참 비슷해요. 전 화랑이고, 님은 승화네요. 벽에 걸린 승화씨 얼굴을 봤어요. 액자 속 얼굴을 보니 저랑 나이가 비슷하거나 조금 적을 것 같은데. 참 멋지게 웃네요. 좋은 재능을 가졌어요. 보는 사람까지 전달되는 감정을 가진 거 말이에요. 솔직한 감정이 사진 안에 담기는 승화씨, 참 좋은 사람일 것 같아요!
그럼 이만, 신을 믿지 않아도 마음이 찔려서 혼자 하는 고해성사를 마칩니다. 땅땅땅.

강화 국자와 주걱(3/5) 끝.

여기까지 읽어주심에 감사드리며, 혹시 궁금하시다면 4편도 있습니다.

keyword
이전 02화우울증과 북스테이, 죽기 전에 산책 한 번은 멋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