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잔 방을 새삼스레 다시 살펴보았다. 할머니집에 있어야 할 듯한 갈색 장롱들이 발 끝에 벽을 채운다. 가지런히 놓인 이불 옆에는 라디에이터가, 남색 베개의 머리맡에는 20년은 족히 함께한 듯한 때깔의 황토색 피아노가 있었다. 황급히 쫓겨나듯 꾸린 내 짐들이 에코백 입에서 토해진 채였다.
우웩- 이렇게 성의없게 넣어지다니, 불쾌해! 예쁘게 정리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가져온 옷더미 중 오늘 입을 옷을 골라냈다. 날씨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죄로 늦은 봄에 내가 입어야 할 것은 갈색 스트라이프 반팔 니트였다. 가장 최근에 구매해서 나도 모르게 손이 갔던 것이다. 다행히 엄마가 지난 서울 나들이에서 강제로 입게 했던 베이지 야상도 함께였다.
난 원래 그런 사람이다. 칭얼거리면서도 엄마가 하라는 거 하고, 시키는 말 잘 듣는 사람.
그러면서 돌아와서는 엄청나게 혼자 스트레스 받는 사람.
차라리 한 번 화라도 내고 싸웠다면 좋았을 걸- 스스로 목 막혀하면서도 잘 때에는
-그래도 나 보러 서울까지 온 사람인데 내가 더 참고 얌전히 있을걸.
후회하는 애매한 효녀. 외투를 걸치니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로는 2-3일에 안부전화 하던 시간이 하루에 두 세번으로 늘어났다. 특히 주말에는 하루 두 시간은 기본으로 영상 통화를 했다. 어제 밤부터 연락이 끊겼으니 엄마가 티를 안 내도 속으로는
'화랑이가 주중에 너무 힘든 일이 있었나? 지금 피곤해서 곯아떨어졌을텐데, 걱정은 되네… 연락 한 통 먼저 하면 화랑이 잠이 깨려나?' 하고 있을 터였다.
그만.
모든 게 버거운 사람이 엄마 생각부터 하는 건 옳지 않다. 화장실에서 간단히 씻어내며 거울을 봤다. 웃음기가 없는 스물 몇의 눈주름. 모공이 선명히 보이는 애매한 청춘의 소멸 전 발버둥이 애처롭다- 스스로 생각한다. 동그란 한옥 특유의 문고리를 열었더니, 주인 할머니가 나를 발견하고 짐짓 웃는다.
"어, 일어났어요? 아침 먹어요."
아침을 준다는 소리를 얼핏 블로그에서 찾았던 것 같은데, 메뉴는 무엇이려나. 책방 건너편의 주방은 솔직히 말하면 난장판같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직사각형의 초록 페인트칠이 엉성한 나무 식탁이다. 좁게 앉으면 족히 8명은 앉을 수 있다. 엄마가 봤으면 기함할법한 장면은 부엌이다. 온갖 나무 그릇들과 도자기들이 어지러이 기준도 없이 찬장 위에 올려져있었다. 설거지가 끝난 많은 그릇들도 자리를 찾지 못해 몸이 말린 채로 개수대 옆에 방치되어 있다. 90년 초반에 시골 학교에서나 쓰던 의자도 부엌 한 가운데 있다. 식탁 외에는 문을 열면 왼쪽으로 좌상이 있다. 아기 보행의자와 에코백, 그림, 책들이 한 데 뒤엉켜 버려진 박물관을 보는 것 같다. 좋게 말하면 앤티크이고, 나쁘게 말하면 철 지난 잡동사니가 때깔이 바랜 채로 방치된 공간. 청소 안 하고 못 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인 줄 알았건만, 역시 재야의 고수는 스케일이 다르구만…
으레 책 좋아해서 책방을 차렸으면 깔끔하고 단정한 말수 없는 수줍은 사람일 줄 알았다. 나이도 많은 할머니라면 더욱이 깐깐하고 조용할 줄 알았고. 이게 웬걸- 내 친구 자취방보다 더 한 하드코어 난이도의 부엌을 맑은 정신으로 맞이하자 어제 라면을 먹은 데가 저기였구나, 불현듯 놀라워졌다.
-나, 여기서 이틀 지낼 수 있을까?
혼자 중얼거렸다. 여사장님은 못 들은 지, 얼른 앉아서 먹으라고 하시곤 샐러드와 밥을 내왔다.
"채소 좋아해요? 오늘은 샐러드랑 연잎밥. 어서 들어요."
아니요, 채소 싫어해요. 특히 샐러드는 제일 싫어요.
-네, 좋아해요. 잘 먹겠습니다.
"연잎밥도 먹어봐. 안에 여러 개 넣고 맛있게 쪘어.
이거 다 먹어야 해? 혹시 매운 것도 좋아하나? 청양고추도 있는데."
연잎밥이라뇨, 콩이랑 비슷하게 생긴 건강식은 누가 돈 줘도 안 먹습니다.
-네, 진짜 맛있네요. 사장님, 여기 들어간 강낭콩이랑 연근도 직접 하신 거예요? 넘 멋져요.
마음과 다르게 체면 차린 말들이 오간다. 부엌에서 내가 한 유일한 진실이 있다면,
-사장님, 여기 커피 직접 내려 먹어도 돼요?
"그럼."
두 잔째 먹어도 되는 드립 커피랄까.
결국 다 먹지 못하고 연잎밥을 남겼다. 샐러드는 어찌어찌 꾸역꾸역 집어넣었다만, 싫어하기로는 대추와 견과류가 쪄진 연잎밥이 위너였다. 조심스레 양해를 구하고 점심에 먹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부엌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안마당에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고 울고 있는 고양이, 요리가 있었다. 청록색으로 바랜 야외 탁자 위에 앉았다가 내가 나오니 연신 나를 따라다녔다. 뭘 원하는 거니, 여러 번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야아아아옹' 뿐이었다.
"알려줄래? 뭘 하고 싶은 거야? 아고 이뻐. 응? 알려주면 안 될까?"
혀가 짧아진 나를 뒤로, 사장님께서는
"그거, 밥 달라고 하루 종일 보채는 거야."라며 정답을 알려주셨다.
"으응, 벌써 밥 주면 안 돼지. 지금 살 쪄서 요리 돼지 됐는데, 자꾸 울면 돼요 안 돼요? 에잇, 조금만 줄 테니까 이만큼만 먹어. 요리는 이제 부엌에서 나가세요~"
야아아아아옹. 이야아아아아옹. 으야이이이아으옹!
말이 통한다는 듯,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 웃겼다. 쿡쿡 소리 없이 웃으며 먼저 책방으로 들어갔다. 오전을 맞은 책들이 햇살을 받아 어제와 달리 빛나고 있었다. 유리창 밖의 장독대를 바라보다가, 집 생각이 났다.
고민하다가 엄마에게 이실직고했다. 나 지금 어디이며, 무얼 할 계획이다.
[엄마는 듣자마자 소름이 확 끼친다. 어제 그 밤중에 어딜 어떻게 갔다고? 우리 화랑이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애. 근데, 거기서 아침이랑 점심은 주니? 얼마인데? 거기 남자는 있어? 여자밖에 없어? 너 말고 다른 손님도 있어? 그럼 거기 문단속은 잘 되는 거고? 주인은 누구야. 할머니라고? 할머니 혼자 살아? 아니면 다른 데는? 주민들이 거기 막 드나들지는 않고?]
왜 갔는지보다 지금 안위가 더 중요한 부모님, 그게 엄마의 역할이지. 알면서도 피로해하는 내가 나쁜 년인거고- 대충 흘려듣는 찰나에 사장님이 전화를 받는 내 어깨를 쿡쿡 찔렀다. 잘됐다 싶어 엄마 전화를 냉큼 끊고 사장님을 따라갔다.
"여기 보라고. 여기부터 여기까지가 우리 정원인데, 예쁜 꽃이 많지? 저기 튤립도 예쁘고."
토요일 오전 10시, 나에게 다가온 뒷동산 꽃밭은 또다시 앤티크였다. 듬성듬성 관리를 안한 티가 나는 잡초들하며, 엎어진 채로 누워있는 수레, 필요한 곳만 정리한 듯한 꽃들의 위치까지. 하고 싶을 때만 꽃을 가꾸겠다는 다짐이 한 눈에 읽히는 정원. 잡초 하나 없이 관리하는 아빠의 정원만 본 터라 낯설었다. 내 아연질색한 표정이 보이지 않았는지 사장님이 자랑스레 꽃 설명을 더했다.
"내가 여기 온 지 10년 째에요. 오자마자 이 꽃 정원을 만들기 시작했어."
-아, 저희 집도 정원 있어요. 아빠가 싫어하시지만.
"그래? 거기도 그래? 남자들은 다 왜 그 모양인지. 우리 집도 남편이 이거 싹 밀어버리려는 거, 내가 말렸어. 예쁜 걸 그냥 가만히 보지를 못한다니까?"
-그러게요, 거긴 효율만 생각하나 봐요. 사장님, 저 분홍 꽃 이름은 뭐예요? 철쭉?
"아~니이? 걔 이름은 삼색 꽃이 다 핀다고 해서 삼색도화인데, 이것 봐봐. 세 개는 무슨~ 하나만 피네, 아구구. 맨 손으로 잡초를 쥐어 뜯었더니 손아구가 아파 죽겠어."
꽃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이름 모를 꽃들이 용케 제 자리인 걸 알고 꼭 박혀 피었다. 어울리지 않는 누추한 땅에 귀한 발걸음을 행차한 선녀들. 이상하게도 덕지덕지 잡초들 사이에 어지러이 편 그 모습이 꼭 한 장의 귀한 사진 같다. 일부러 저렇게 만드려고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가히 오늘도 짝짝이 크록스 신발을 신고 녹슨 철통에 물을 담아 뿌리는 사장님의 집 다웠다. 억지로 꽃 구경을 마친 뒤, 해를 따라 안마당에서 볕을 쬐고 있는 요리 앞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뭘 할까- 아, 따스하다- 집이었다면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인데, 여기 해는 부지런하기도 하지—
-이, 네, 또 왜요?
"저기 가서 보라고. 저거 봤어?"
몽롱한 내 두 눈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분홍색 꽃들이 해사하게 겹쳐 나무에 한가득 피어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에 한 눈에 마음을 뺏긴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 나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문을 열고 시선을 가렸던 비닐하우스를 지나치자 압도될 만큼 커다랗게 분홍 꽃들이 내 머리 위를 수놓았다. 입이 벌어졌다.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아 이내 입을 틀어막았다. 눈이 부심에도 계속 쳐다보게 되는 화려함이었다. 족히 100년은 산 듯했다. 두꺼운 나무줄기가 하늘을 향해 뻗어낸 가지에는 조금의 양보도 없이 서로 잘났다며 진분홍, 연분홍 겹벚꽃이 바람에 살랑이고 있다. 내 손을 뻗으면 닿을까, 들어보았지만 살짝 모자르게 부족했다. 만화 속에서나 보던 봄이었다. 이상하게 처음으로 올 해 첫 꽃구경을 했다고 생각했다. 무려 몇 달 전부터 고등학교 친구와 계획한 벚꽃 나들이를 4월 초, 야심차게 다녀 왔으면서. 벚꽃 축제가 열리기 일주일 전이지만 사람들은 모두 벚꽃이 언제 다 피었는지 인스타를 통해 알고선 다 함께 석촌 호수 산책을 나섰다. 고등학교 야자 시간에 한없이 수다 떨며 운동장을 돌 때처럼, 내 친구도 이미 벚꽃 맞이에 나선 회전 초밥 산책 릴레이에 자연스레 끼어 사람 반, 벚꽃 반의 봄을 맛봤다. 카카오톡 프사도 가장 잘 나온 것으로 바꿔놓았었다. 분명 난 그 때 봄을 맞이했는데, 그랬는데.
내 마음에서 봄은 아직 오지 않았었구나.
오늘이 일 년 동안 기억될 진짜 봄의 시작이구나.
내 반응이 뒤 꽃밭과 다름에 만족한 사장님은 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자 눈물이 차올랐다. 왈칵이 아니고.
올랑올랑 뿌앵- 꿈틀꿈틀 머금던 슬픔이 입술을 깨물 새 없이 흘러나왔다.
왜 우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울었다.
하늘 색이랑 꽃 색이랑 저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너무 예쁜 장면을 보면 감격에 겨워 운다던데, 나는 감격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일 뿐이다. 이유가 중요하지 않은 감정이 오랜만이었다. 이 예쁘고 찬란한 꽃나무를 보면서 계속 울었다. 눈물을 닦으면 다시 울었다. 꽃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문득 추측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드디어 내가, 나 힘든 걸 알게 되었구나. 내가 내 아픈 마음을 오늘 인정했구나. 나는 울 수 있는 사람인 걸 인증받은 것이 기뻤다. 그래서 바닥에 앉아 꽃을 쳐다보며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었다.
나는 근 일 년간 가뭄이었다. 남들이 힘들겠다며 위로의 말을 건네도
'이 정도는 다들 돈 벌려면 힘든 것 아냐?',
'내가 감당할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남들은 결국 남 일이잖아.'
'이 정도는 다들 책임지고 살아야지. 나도 그렇고.
'라고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그래서 힘들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무언가에 아프고 쓰라려도, 적당히 약 바르면 그만이다. 아무도 다치지 않는 사회생활은 없다. 인생은 모두 고통이다. 즐거움만 추구하다가는 거지꼴 못 면한다.
라고 자기 최면을 거는 젊은이는 이렇게 곧 죽기 직전으로 삶을 도망치게 되어있다.
닳고 닳은 몸뚱아리가 드디어 죽기 직전에야 실토하는구나. 나, 너 힘든 것 알고 있다. 진짜 너 아팠던 것 맞다. 울어도 된다. 계속해서 불어오는 바람에 꽃잎이 머리 위로 자꾸만 떨어졌다. 그럼에도 촘촘히 보석 십자수마냥 하늘을 수놓은 꽃의 싱그러움에 나는 몸둘 바를 몰랐다. 시원하다. 도망친 곳에서 찾은 단비가 그렇게 나를 살린다.
20분 가량 꽃과 머물다 책방에 돌아왔다.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왔다. 이미 사장님과 알고 있는 사이인 듯, 자연스레 커피를 건넸다. 컵에 '카페 큰나무'라고 써 있었다. 아무도 없을 줄 알고 벌컥 열어제낀 당당한 손짓들이 나를 보고 흠칫 놀라 조심스러워졌다. 사장님이 나를 살짝 부르더니
"커피 더 먹을래?"
하며 자신의 몫의 커피를 나누어주었다.
"나는 커피가 연해야 해. 너무 진하면 힘들어- 그리고 꿀도 타 먹어."
라면서 멋쩍은 듯이 꿀을 넣은, 밍밍한 커피 반 잔을 말이다.
자기들끼리 부엌으로 가서 이야기하자길래 나는 산책길을 찾아 보겠노라며 길을 나섰다. 사장님은 그럴래?하고는 자신의 텃밭을 밟고 남의 집 앞 길을 통해 카페에 빠르게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카페에서 오른쪽으로 틀면 산책로가 시작된다는 표시가 있다고 했다. 나는 일단 라떼가 고팠으므로, 카페에 들어가서 먼저 커피를 테이크아웃 하기로 했다. 다 무너져가는 원래부터 살았던 듯 싶은 초가집과 누가 봐도 새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의 반짝이는 정돈된 주택들을 몇 개 거치고, 오골계와 닭이 싸우는 소리도 거치고, 웬 할아버지가 자신의 밭에 물을 뿌리며 은근히 나를 쳐다보는 시선도 거치자 5분 만에 '카페 큰나무'라는 팻말을 찾았다. 말 그대로 팻말 바로 뒤에는 꽃나무처럼 큰 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카페 건물 옆에 똑같이 생긴 1층 건물들이 4개 있었다. 펜션을 함께 하는건가, 가족 단위 독채 펜션이라면 다음에는 저기에 묵어도 괜찮겠다 생각하며 카페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밝은 목소리로 맞이하는 인사를 들어본다. 눈맞춤까지! 네 개의 순한 눈망울이 외지인인 나를 향해 꽂혔다. 뭐지, 이 카페 왜 이렇게 밝지? 당황하며 일단 커피를 테이크아웃 주문했다. 금방 만들어드릴게요-라며 현재 상황까지 알려주는 카페 알바생들은 엄마보단 어리고, 언니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까지로 보였다. 40대가 넘어가면 얼굴에 그 사람의 인생이 점차 보인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크게 힘든 일 없이 온화한 삶을 살아왔으리라, 짐작할 정도로 그 나이대에 보일 수 없는 맑고 투명한 웃음기를 지니고 있었다. 반 묶음으로 단아하게 정리한 머리에서는 산뜻함도 엿보였다.
-저기, 혹시 산책로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아세요?
"아 네에~ 산책로요? 음, 카페에서 나오면 저기 보이시는 우체통 있죠? 거기에서 오른쪽으로 꺾는 길이 있는데, 거기부터 산길이라고 들었어요. 제가 직접 가 보지는 않아서, 표시 따라 계속 가면 된다고 하던데, 여기 처음 오셨어요? 어떻게 오셨어요?"
해사한 표정으로 묻는 아주머님은 꼭 경계 없는 비숑을 닮았다- 생각하며 말을 골랐다.
-저, 스테이 했어요. 오늘도 묵을 거고요. 저 밑에 책방이요.
"아, 그렇구나~? 책방 사장님이랑 저희 아주 친해요. 그래서 이 커피잔을 들고 오셨구나~?
-네. 사장님께서 커피 나눠 주셔서요. 오는 길에 다 먹어버려서 다른 커피 먹으러 여기 들렀어요. 들고 무슨 왕릉이 하나 있다던데, 거기까지 가 보려고요.
"맞아요, 릉~ 30분 정도 걸린다던데, 저는 잘 모르겠긴 해요. 그래도 여기 다녀오신 분들이 들려주셨는데, 걷기 좋은 곳이래요~! 여기, 커피 나왔어요."
감사를 표한 뒤, 잠시 카페를 둘러보았다. 편안한 분위기를 위한 듯, 다양한 목조 책상과 의자들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유리 중문으로 구분된 다른 공간에는 모르는 내가 봐도 비싸 보이는 다양한 음향 스피커 기구와 LP, 책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책방 사장님도 여기 와서 정리하는 법을 좀 배우면 좋으련만-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마음이 놓이는 공간이었다. 산책이 끝나면 여기에 와서 좀 다이어리도 쓰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도 읽어야겠다 다짐하며 길을 나섰다.
-이 표시가 맞나? 쓰읍, 이게 혹시 색이 다르면 가지 말라는 의미인가?
등산이나 산책을 자주 해봤어야 알지.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도 전혀 상관없는 이 산책로는 아무도 없었다. 어떤 곳은 참 예쁘게 손질되어 있어 갈림길이 나오면 선택하기 쉬웠지만, 대부분은 릉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서해랑길' 이라는 표시가 달린, 무당집에서 쓸 법한 노랗거나 초록색 천이 나무 어딘가에 걸려있는 지를 확인하는 것이 내가 얻을 수 있는 힌트의 전부였다. 가끔은 양쪽 갈림길 모두에 묶여 있기도 했다. 와르르- 무너지는 자신감은 길치의 두려움을 이끌어냈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으니 핸드폰으로 노래를 크게 틀고 산책길에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웨옹-'하는 소리가 났다. 식겁해서 핸드폰 노래를 껐다. 다시 '웨옹-'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울창한 숲 속인데, 내가 너무 안일했다. 곰이나 늑대나 하다못해 고라니가 나올 수도 있었다. 낮 시간이라고 방심했다- 싶어 핸드폰 소리를 끄고 뒷걸음질쳤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은 아주 빨랐다….만, 1분 정도 되돌아가니 옆 길에서 공사를 하고 있었다. 자꾸 나던 산짐승 소리는 작은 포크레인이 땅을 긁는 소리였다. 쫄보의 간덩어리를 사수함에 감사하며, 그 다음부터는 노래도 끄고 발자국을 천천히 걸었다.
"걸어서 왕복 1시간이면 왕릉이 나와. 거기까지 가는 게 짧고 길도 편해서 산책하기 딱이야. 대신 신발은 운동화 신어야 할 걸?"
사장님, 왕복 1시간이 아니라 편도 1시간이었잖아요.
12시에 출발했는데, 12시 30분이 되어서도 왕릉은 커녕 다른 생명체 하나 보일 기미가 없는 나는 마침 눈 앞에 보이는 나무 의자에 털썩 앉았다. 발을 올려 다리를 모아 안았다. 오랜만에 이렇게 숲 속에서 걸어본다. 울창한 나무 숲 속,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상쾌하다. 상쾌하긴 하네, 뭐. 중간에 이렇게 나 같은 사람 쉬라고 나무 의자들도 있나보다. 나 같이 금방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을 토닥여주려고.
갑자기 내 얼굴 상태가 어느 모냥인지 확인하고 싶어 핸드폰을 들었다. 겨우 씻고 화장도 안 한 채로 산책하는 이십대 후반의 몰골이란, 얼마나 형편없을까. 많이 상처입지는 않겠다고 어플을 켰다. 어플을 통해 살펴본 내 얼굴은,
어라- 생각보다 예뻤다.
직장을 다니며 블라우스에 정장 치마에 눈 밑에는 피곤한 내색 없애려고 반짝이 화장까지 칠하는 난데, 나를 예쁘다고 생각한 게 3년 전이었나. 요새는 특히 쳐진 눈꺼풀에 불만이 하늘을 찔러 거울도 쳐다보기 싫었다.
매일 아름다워지려고 꾸미는 것이 아닌, 봐줄 만한 인간성을 회복하려고 치장으로 칠갑을 했다. 가면이 화려하면 파티에 적합한 옷차림이라 칭송받는다. 가면을 벗어내고 맨 얼굴을 외면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신경쓰지 않는 사회이다. 그렇게 자신을 잃어간다. 나도 그렇게 잃었다. 더 이상 젊고 어리다고만은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평생 없을 것 같던 눈 밑 주름이 자리를 잡으려고 버티기 시작한다. 싫었는데, 그래서 더 나이먹기 싫었는데, 지금 한 꺼풀도 치장하지 않은 나는 무엇이 예쁠까? 웃어본다. 숨이 트이게 자연스럽다. 다른 색을 칠하지 않은 거무튀튀한 입술이 주변의 나무와 잎사귀들과 잘 어우러진다. 어라, 나 가을 웜톤 아니고 숲 웜톤인가 보다. 기뻤다. 나를 아름답게 보는 내가 기특해 사진을 몇 방 찍어 가족 단톡방에 올렸다. 이제 다시 왕릉을 끝까지 찍고 갈 힘이 생겼다.
다리를 계속 움직이면서 두 눈으로 표식을 찾는다. 밑으로 내려가야 하나, 고민일 때 턱하니 꽂힌 '길없음, 개조심' 팻말도 본다. 갑자기 산책로가 끊겨 당황스러울 때, 공사판 너머로 흔들리는 노란 표식을 발견한다. 공사판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표식이 있는 길 안에 쏙 숨는다. 내 앞에는 다섯 걸음마다 한 개씩, 누군가가 묶어 놓은 다음 표식이 있다. 참 좋다. 왕릉이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지도로 애써 찾지는 않았다. 눈 앞에 표식이 자꾸 보이고, 중간에 쉬어가라고 의자가 보일 때도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했다.
내 삶에 이정표가 이만큼 세워져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언제쯤 쉴 수 있는 의자가 있다고 알려주면 내가 이렇게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까. 언제든지 쉬었다가 다시 일어서도 그 길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온 것만해도 대견하다.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돌아가도 좋다. 네 여정에서 본 모든 것들이 네 자산이다. 스스로에게 알려주었다면 어땠을까.
두 번째 의자를 만나 쉬다가 이만하면 충분히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싶어 고민했다. 그러다 '에라잇, 여기까지 온 거 좀 더 걸려도 끝까지 가보자!' 하고 다짐하자마자 5분 만에 왕릉을 발견했다. 포기하지 않았더니 결국 볼 수 있었다는 뿌듯함, 눈 앞에 두고 포기할 뻔했던 내 자신에 대한 귀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늘에서 날 보면 그럴 것이다.
[저 녀석 저거, 눈 앞에 두고 돌아가다니, 아깝구려. 딱 한 걸음 남았었는데 말이지.]
[에그, 기껏해서 여기까지 온 사람 칭찬은 못 할 망정! 저 아이가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조심하면서 개울가도 건너고, 진흙길에도 빠지고, 공사판도 넘어왔는데!]
내가 왕릉을 너무 좋아해서 찾아 오려고 한 것도 아니고, 막상 보니 큰 감상은 없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기로 결심한 내가 좋았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을 산책길에 나선 것도, 매 갈림길마다 맞는 길인지 여러 번 뒤돌아가면서도 한 길을 정한 것도, 잘못된 길이다 싶으면 망설이지 않고 되돌아오면서도 자책하지 않은 것도 모두 나다. 그게 나였다. 직장에 콕 박혀 톱니바퀴 굴러가듯 살아내던 나는 이만큼 대단하고 반짝거리는 사람이다. 알면서도 자꾸 의심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나는 늙었기 때문에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무덤을 보고 돌아서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 소리 내서 말했다.
-돌아가서부터, 글 써야겠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상상을 애써 누르며 살았다.
예술은, 작가는 대단한 사람만 하는 것이라고 술에 스스로를 가뒀다. 흐리게 세상을 보면 도전할 시간이 없다. 도전하지 않는 것이 지금까지 쌓아온 나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리석은 라화랑, 어리석은 허영심이여.
미래를 기대할 희망이 떠오르고 있었다. 돌아오는 산책길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가뿐한 발걸음으로 내려왔다. 쿵쾅 소리내며,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부르며, 꽂히는 노래에는 발재간으로 약간의 춤도 추면서.
오늘을 살아갈 힘, 내일을 기대할 힘, 어제를 인정할 힘. 세 가지가 있으면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내가 없었던 힘은 내일이었다.
나는 천성적으로 내일이 있어야 오늘과 어제가 있는 사람이다. 내일을 기대하자, 오늘과 어제에 힘이 생겼다. 왕릉을 봤더니 무덤과 관련된 로맨스 글을 써보고 싶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겪은 사랑 이야기부터 써야 하는데, 하지만 최근까지 마음 아팠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쓰는 것도 공감되게 쓸 수 있겠어. 머릿속으로 가득한 미래의 즐거움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책방으로 돌아가서 얼른 키보드와 태블릿을 챙겼다. 카페에 다시 방문했다. 두 번째 커피를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잘 다녀오셨냐며, 산책길은 어땠냐고 여쭤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