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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북스테이, 우리 이제 그만하자-할머니도 엄마도

가족의 무거움, 이제 그만해줘 제발 - 이천 오월의 푸른하늘(1)

by 라화랑

[나 할머닌데, 왜 안 오냐고. 그래 일이 바쁘나? 뭐 하는데 바쁘나. 어딘데 바쁘나.

뭐 한다고 바쁘나. 그래 바쁘나?]


가만히 듣다보니 표정이 굳어진다. 딱딱한 눈빛을 숨기지 않은 내가 목소리만큼은 친절하게 대답한다.


-그러게요, 아빠 닮았나보지 뭐. 나도 아빠처럼 계획해서 해야할 게 많더라고.


할머니가 대답을 잘 못할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일부러 아빠를 들먹거려보았다. 이렇게 고까운 태도의 손녀 뭐가 보고싶다는 건가 싶다가도 제 말 다 듣고 성실하게 뜨거운 물 대신 미지근한 물로 채워줄, 성실하고 마음 편한 비서가 필요한 날이구나 - 생각해버린다.


[그래 오늘 오는 형부랑은 만나봤나. 어떻드나. 그래 뭐 하는 사람인지는 너도 아나.

맏이인고? 어어 모른다꼬. 그래 만나봤다고.

그래 결혼식날 만나면 될 걸 오늘 뭐한다고 여기 온다잖나. 그래 내 니네 아빠는 원래 심심한 사람이니 그래 오늘 언니가 지 신랑이랑 같이 온다니 여 오시오. 한거 알았다 했지. 그러고 너 엄마 전화와서는 말하길래 당연히 너도 오는 줄 알고 그래 오나 물었더니 안 온다 카잖나.


이리 속상하다. 그래 속상해가꼬 전화번호도 할미 이제 못 외운다. 할미가 그래 속상해가꼬 전화를 눌러서 했는데 뭐 곧 죽지 이래 살 때 한 번이라도 더 봐야 하는데 그래 바쁘더나. 이리 속상하니.

그래 일 너무 잘해서 너무 바쁜 거 아니나. 주말에도 그래 일하나. 그래 속상해. 그래 그래 보고싶제. 그래 전화했다. 바깥 사람들 조오심하고, 바깥 음식 사먹지 말고, 집에 쌀은 있나. 사먹나?


그래그래 됐다~ 밥 만들어 먹으레이. 그래 이만 또 바쁜 아 데리고 전화를 다 했다. 페페이 ]


할머니는 전화를 끊거나 말을 길게 했을 때 마지막 말로 페페이-라고 소리내는 버릇이 있다. 정확히 발음하자면 [패패:이이] 이다. 두번째 패가 제일 길고 이는 마지막 이가 더 크고 높은 소리가 나게 끌면 된다. 버릇을 아는 손주가 몇이나 될까. 날 붙들고 본인 이야기를 계속 하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준 적은 없는 할머니가 밉지는 않다.


다만 지금은, 지겹다. 할머니 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말이다.


오늘은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는 날이다.


처음으로, 가족보다 날 우선으로 두었다. 꿉꿉하게 마음 안쪽이 눌리면서도 숨이 트인다. 자취방을 얻어 독립한 지는 꽤 되었지만, 난 아직도 이십 몇 세의 어린애이다. 얌전한 막내딸이고. 형제 자매를 챙기는 귀염둥이이면서 엄마 친구들이 말하는, 서울 주변에서 직장을 잡았지만 엄마를 보러 자주 강릉에 내려오는 고마운 자식이다.

집안 행사에 빠지는 게 처음이라 낯설다. 이렇게 해도 되나, 아직까지도 ktx 서울역으로 향해야 하는 건 아닌가 걱정된다. 하지만 나 먼저 살아야 하니까 생각을 마치기 전에 대답이 먼저 나오더라.


-나 약속 있어. 그 날 못 가.

엄마도 언니 시간에 다 맞출 필요 없다고 2주 전에 나한테 약속 잡아도 된다고 했잖아.


[아니이- 그랬어? 난 또 혹시하고, 강릉에 오나 했지이…]


속상한 마음 애써 감추려는 그 목소리에 지금껏 다른 일정을 접고 집에 내려갔었지. 하지만 이젠 안 되겠다. 할머니 전화를 끊고 나니 넘실넘실 가족 생각이 밀려 들어온다. 눈을 감듯이 생각을 감을 수는 없을까? 차단기가 내려와서 하고 싶지 않은 생각들을 잘라줬으면 좋겠다. 90년대 뮤직비디오 주인공처럼 지하철 출구에서 고개를 살살 내저으니 사람들이 곁눈질로 잠시 눈길을 준다. 황급히 무언가 떠오른 척 하며 8번 출구를 찾았다. 국자와 주걱 북스테이와 달리 가격은 더 비싸지만 아침 식사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간단히 빵을 구입했다. 미리 스포하자면, 그 빵은 돌아와서 이틀 째인 지금도 내 식탁 위에 예쁘게 앉아있다.



3401번을 기다리며 귓가에 울리는 노래 소리를 키웠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짐을 내려놓았다. 한결 가뿐한 몸에 시선이 자유로워진다. 온갖 빨간 버스가 섰다가 출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안한 차림에 백팩을 멨다. 인스타에 보이는 에어맥스와 통 넓은 카고 바지형, 자다가 나온 것 같은 회색 면 츄리닝에 캡 모자형, 멋낸 트렌치코트에 체인 있는 작은 가방을 멘 나들이 형들이 빨간 버스에 탄다. 떠나는 표정이 못내 진지하다.


나도 마찬가지다. 버스정류장에서 방긋 웃으며 사람들을 관찰하는 여자는 사이비 종교를 전도하는 것으로 보일 테니 말이다. 어차피 얼굴 근육도 휴무일이다. 금요일 일찍 퇴근을 위해 반차를 신청했지만, 상사가 다른 회의에 들어가버려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 회의 결과까지 들어야 할 때 모든 얼굴 근육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설설 하얀 깃발을 들고 도망친 근육들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억지로 웃음을 만들어낼 필요 없는 도시의 매정함이 도움이 되는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40분가량 걸린다고 했으니, 핸드폰 충전부터 한다. 오랜만에 탄 빨간 버스는 달라진 점 없이 그대로였다. 댄스 배우겠다며 퇴근하고나서도 시흥에서 강남까지 힘든 줄 몰랐던 내가, 아는 사람도 만나기 싫다며 제발 연락 오지 않았으면 하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강남에서 이천으로 떠나가는 나로 바뀌었을 뿐이다.

어, 그 땐 예뻤다.

진짜 내 사진으로 증명할 수는 없으니 뻔뻔하게 말한다. 적어도 내가 날 예쁘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오늘따라 로이킴 목소리가 잘 어울린다.

KakaoTalk_20230831_112425119.jpg 로이킴 - 우리 그만하자, [유튜브 뮤직]


[그래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될 수 없는 건 할 수 없는 건

결국 다 내 탓인 거겠지 뭐

혼자 기도를 해봐도

가질 수 없는 걸 바라고 있는

내 자신이 더 슬퍼 보였어

우리 이제 그만하자

아프지 말라는 말도 잘 자라는 말도

우리 이제 그만하자

사랑한다는 말도 똑바로 못하면서 ]


지나간 옛사랑이 생각나서가 아니다.

쓸쓸하게 지금의 나를 인정하는 목소리가 나 같아서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가질 수 없는 건, 나에 대한 사랑 아닐까.


따스하게 날 보살필 자신이 없어진 내가 나에게 그만하자고 선고하는 듯 하다. 이렇게 소비되라고 만든 노래가 아닐텐데, 로이킴은 나에게 이용당했다. 사랑한다고 똑바로 말도 못하는 나는 바깥에서는 그렇게도 칭찬을 잘 해준다. 한 달에 한번씩 구성원이 바뀌는 홍대 독서모임이 있다. 거기서 뱉는 으레 하는 내 말에 사람들이 참 고맙다고, 그런데 혹시 상담일 하시냐고 물어보더라.

나는 대답한다.


- 그냥, 남들을 잘 관찰해서 그래요. 제 일은 포장입니다. 남 포장하기.


그런 내가 내 칭찬을 할 줄 모른다. 중은 제 머리를 못 깎고 칭찬 로봇은 날 관찰할 시간이 부족한건지, 관찰을 했음에도 별 거 아닌 걸로 칭찬하는 제 모습이 더 비참하다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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