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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북스테이, 이 작은 세상이 전부기를:세상 외면

가족에게 도망쳐버린 우울증 환자가 보는 천국 - 오월의 푸른 하늘(3)

by 라화랑

비가 온 직후라 땅이 축축하게 젖었다. 질퍽거리는 주차장 흙을 신경쓰고 있노라니, 절에서 들리는 종소리가 퍼졌다. 맑은 소리는 차마 딸랑이라고 쓸 수 없게 아름다웠다. 바람이 계속 부는지라 가볍게 흔들리는 금속 덩어리가 이렇게 사람을 산뜻하게 할 수 있구나-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잔잔한 소리가 계속됐다. 처음 맡는 풀내음 향수를 맡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바라보았다.


하얀 한옥이 ㄷ자로 연결되어 있다. 푸른 색 지붕과 짙은 갈색 나무 데크가 잘 어울린다. 때 탄 하얀 파라솔 밑에 알록달록한 야외용 테이블과 의자들이 같은 모양 하나 없이 자리 잡았다. 어린이 보호구역에 있을 것만 같은 샛노란 철제 의자부터 낚시터를 구경나온 관광객들이 앉아있을 것 같은 하늘색 긴 나무 의자까지 쫄딱 비를 맞았다. 고인 빗물에는 흐릿한 하늘이 비친다. 지붕 밑에 간간이 달린 주광색 전등이 은은하다. 하울에 움직이는 성에 나왔던 가로등과 먼 친척쯤은 될 법한 긴 가로등도 장독대 뒤에 떡하니 반짝인다. 전구 밑에 여러 안내판이 붙어있다.

나중에 읽어봐야지, 생각하며 '이쪽으로 들어오세요'라는 입간판을 따라 걸었다. 가장 정문과 가까운 곳이 본체이구만. 문을 열기 조심스럽다. 유리에 붙여진 '책방 내 정숙' 글귀 때문이다. 잔뜩 쫀 나는 오른손에 가방을 움켜쥐고 살짝 문을 열었다.


-저… 오늘 책방 스테이 하러 왔는데요.


[아 네, 성함이?]


내 이름을 묻는 사람이 사장님인가 보다. 왜 난 당연히 책방 사장님이 여자라고 생각했을까? 앞서 다녀온 국자와 주걱 때문인가, 아니다. 예약을 한 뒤 확정되었다는 문자가 다정했기 때문이다.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위한 다정함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왜 몰랐지? 지친 몸이 편견 알고리즘을 실행시켰나 보다.


오늘도 무식한 티를 내는구나, 절망스럽다.


[여기 처음이신가요? 네, 그럼 간단히 책방 이용 규칙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하시면 됩니다. 오늘 묵으실 방에서는 …. 따라오실까요? …. 그럼, 열쇠는 여기있습니다. 저는 이만 나가볼게요. ]


간단한 소개를 스스로 채찍질하며 듣다 보니 사장님은 이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후였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북스테이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예약을 한 터라 침대가 2개인 독채에 배정받았다. 이 날짜에 예약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는걸. 싱글 침대 2개 머리 맡에는 세계 다양한 나라의 그림책이 좌라락 전시되어 있었다. 사장님에게 나는 그림책 덕후로 보였을까. 혼자 이 곳을 차지하겠다며 예약한 나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아니다. 남 생각, 누구 눈치 안 보려고 찾아온 공간이다.

즐기자.

씩씩하고 약하게 - 힘들면 그대로 폭 쓰러지자.


오후 4시였지만 점심을 제대로 먹지 않아 점심 겸 이른 저녁도 먹을 겸 주변 산책에 나섰다. 다행히 버스에 내려 책방까지 도착할 때 봐 두었던 음식점이 있어 입장했다. 양평해장국이다. 손님은 나밖에 없었다. 5분만에 나온 해장국을 나는 전 날 술마신 아저씨들처럼 고추를 때려넣고 싹싹 긁어먹었다. 옆에서 들리는 tv 뉴스소리도 무시했다. 다 먹을 때까지 고개 한 번 안 들고 흡입한 나를 결제할 때 은근한 웃음으로 칭찬해주셨던 것, 다 알고 있어요 사장님! 혼자 나 편할대로 해석해가며 배에 손을 문질렀다.


책방으로 돌아오는 길이 집에 가는 것 같이 편안하다.

퇴근하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확신에 찬 발걸음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있고, 싫어하는 것들은 없는 작은 안식처.

책, 조용함, 어디든 읽을 수 있는 높이의 책상과 의자, 여유로운 시간, 작은 정원이 있고

소음, 사람, 눈치, 연결이 없다.


이 작은 세상이 내 전부가 되어도 좋겠다.



돌아와서 책방을 다시 맞이하자, 무턱대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그만 멈추고 싶다.


그래도, 세상을 멈추기 전에 만화책은 보고 가야겠어. 애니메이션과 만화책 오타쿠로서의 화랑이가 고개를 빼꼼 들고 '저기는 가 보고 죽어라-'며 내 몸에게 명령한다. 예- 따라야죠. 갑니다 가요.


먼저 만화라고 써 있는 곳에 들어갔다. 거인의 한 뼘 크기 방이다. 내가 대부분 읽어봤거나, 모르지만 읽고 싶지 않아서 제껴둔 만화책들이 책장을 가득 채웠기에 잠시 뒤적이다 나왔다. '홀로서기'라고 쓰여있는 한옥에 살며시 들어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마음에 쏙 들 푹신한 파란 소파와 긴 나무 의자가 카페처럼 놓여져 있었다. 소파는, 보이면 일단 앉아야 한다. 그리고 먼저 앉는 사람이 승자다. 역시나 폭 내 엉덩이를 감싸는 감촉이 제 집 안방같다. 소파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독립출판물과 시집이 많다. 최근에 쓰여지지 않은, 그러나 몇 번 들어는 본 유명한 소설들도 요 사랑방에 은근히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 잠시 일어나 독립출판물들을 손으로 스쳐보았다. 스무 살에 대학을 포기하고 전 세계를 일주한 일기를 담은 여행기가 있었다. 표지에 말갛게 웃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남을 위해 웃는 게 아닌 사람은 저렇게 눈이 반짝이는구나- 부러웠다. 읽을 용기가 없어 내려놓았다. 퇴사를 한 뒤의 삶에 대한 책, 시골에서 사는 것의 즐거움을 그린 책, 사랑에 대한 시집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작가가 되고 싶으면 일단 멋진 경험을 해야 하는 건가, 싶어 내용을 보면 솔직히 생각보다 별로였다.

그러니까, 별것 아닌 것들로 책들을 내고 작가 타이틀을 가져가는 것이다.


독립출판물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 인정한다. 문학동네나 민음사가 계약한 사람들 혹은 어디 문학상 수상자들만 양질의 책을 뽑아냈으면 했다. 기깔나게 뽑은 이름에 속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엇 좀 재미있겠는데? 싶어 책을 들어 한 두 페이지를 찍어먹어보면, 으에퉤퉤- 이거 요리도 제대로 안 된 불량식품이잖아! 하며 황급히 내려놓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 고까운 시선의 아랫바닥에는, 내가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저주가 담겨있었다.


나는 그런 어마어마한 천재성 작가가 될 수 없으니 책을 내는 사람들은 모두 대단한 예술가들이어야만 한다고 멋대로 기준을 정해버렸다.


사실은 나도 끼고 싶었던 거다. 어떻게 해서든지 지지부진한 일기나마 끝까지 써본 적 없는 주제에, 언젠가는 책을 내고 싶은데 나는 그 무리에 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땡깡을 부리면서 씨익씨익거렸던 것이다. 에베베베- 저기 저 선 넘어가는 사람 다 바보야!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부를거거든!


… 그렇게 말하는 미운 일곱살짜리는 클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 말이다.

미안합니다, 제 욕심에 열심히 사시는 모두를 욕하고 말았어요. 혼자 참회의 시간을 가지며 소설 하나를 집어들었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소파에 앉아 끝까지 읽었다. 연작소설 형식의 요즘 사람들을 주제로 한 책이었는데, 괜찮았다. 꽤 재미있어서 독후감도 간단히 썼다.


마침 책을 다 읽을 무렵, 책방에 머무르는 다른 손님이 들어오길래 반사적으로 몸이 튕겨져 나갔다. 이제 정복 못 한 공간은 단 하나! 사장님이 계신 본관이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다면 주저 않고 다시 이 사랑채로 도망치리, 문 앞 의자에 앉아 혼자만의 다짐에 빠져있었다.



그 때였다. 가벼운 진동이 느껴진다.

토돗토돗- 경쾌한 리듬소리, 누군가가 날 멀찍이서 쳐다보는 이 시선.


이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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