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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북스테이, 나랑 내가 화해가 가능할까 - 글쎄

나만 생각하기, 이기적이지 않다 다독여줘 - (4) 이천 오월의 푸른하늘

by 라화랑


당연한 걸 그렇게 물어보시다니, 물론 돼요!

붉어진 얼굴을 숨긴 채 와다다다 쏘아 붙인 나의 제안을 사장님은 뭐 그런 숨 쉬어도 되냐는 걸 물어보냐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답했다. 말을 건 용기, 나 칭찬해- 네 다섯 번 가슴을 혼자 쓰다듬어 주었다. 어제 앉은 그 자리에 앉아 다시 책을 읽었다.


아침을 먹자마자 책방에 출근해서 독서를 할 수 있다니, 북스테이 이런 맛에 오는 거 아닙니까?


다른 손님들은 더 바쁜 무슨 일정이 있길래 이 기쁨을 모르고 가는 걸까? 안쓰러워질 지경이었다.

… 그리고 점심 시간이 되었다.

여긴 이상하다. 시간을 잡아먹는 노래가 있다. 나는 분명히 평소처럼 생활했는데,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몇 번 반복되다보면 몇 시간이 보란듯이 사라져 있다. 어벙벙한 표정으로 잠시 책에서 빠져나와 주변 식사 장소를 검색했다. 어, 근데 여기에 내 짐 다 놔두고 다녀와도 될런가. 민폐 손님이 되는 건가. 이만하면 웬만치 즐겼으니 돌아가야 하나. 그 때였다.


[저기, 저희 지금 점심 시키려고 하는데 혹시 같이 드시겠어요? 분식집에서 배달 시키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한 번, 분식집이라는 단어에 두 번 눈이 커졌다.


-진짜요? 어머, 저는 너무 좋아요! 안 그래도 저 지금 점심 어떻게 할까하고 핸드폰으로 찾고 있었거든요.

내가 있는지 모르는 줄 알았던 사장님이 벽에게 말하듯 다른 한 편을 보며 말했다.

… 책방에 나 밖에 없는데, 사장님이 사장님에게 혼자 말 하는 그런 건 아니겠지 의심이 갈 만큼 어긋난 시선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거기에 거울이 있었던 것 같다. 비친 나를 계속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혼자 깜짝 놀랄 서스펜스. 어쨌거나 어쨌거나, 분식은 내 삶의 활력소지.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사장님이 계신(분식을 시켜준다는데, 계시는 분이지!)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제가 한 번 봐도 될까요? 엇 저는…. 여기, 혹시 냄새 나는 음식은 안 된다고…


내 눈은 이미 떡볶이를 발견해 버렸는데, 원칙을 어기는 건 싫은데, 하지만 내 원칙은 일요일엔 떡볶이나 피자를 먹는 거란 말야- 애달픈 눈빛을 장착하고 처음으로 사장님 눈을 제대로 마주쳤다.


[괜찮아요. 어차피 다른 손님들도 오후 늦게 오신다고 했고, 밖에서 먹으면 되니까요. 이거 시키시겠어요?]


-엇, 네에… 저 제가 떡볶이를 지인짜 좋아하거든요. 지이인짜 감사합니다! 세상에나.


살풋 웃은 사장님께서 음식이 오면 알려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진짜, 잠깐 사장님이 멋진 남자 주인공으로 보였다. 떡볶이의 후광을 단 책방 사장님, 만세다. 떡볶이 용사님이 자비롭게 허락해주신 점심 식사가 도착하고, 난 사장님과 실갱이를 한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요.


[괜찮아요.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니, 그래도오… 아무래도 책에 냄새 밸 것 같고, 또오…

[밖에 바람 많이 불어요. 안에서 먹어요 그냥. 저 정말 괜찮으니까 저기 앉아요.]


도륵도륵, 눈만 굴리며 어쩔 줄 모른채 음식을 받는 나와 그 쟁반을 기어코 책방 책상 위에 올려놓으려는 사장님과의 싸움이다. 늦게까지 책방을 떠나지 않은 손님 하나 때문에 책방 규칙을 깨는 것도 싫고, 판매하는 책이 망가질 까 두렵고, 냄새 배면 빼기 힘들까 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 나의 반대편에 서서 지금 밖에서 음식을 먹기에는 파라솔이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많이 불고, 책방 냄새야 손님들 없으니 빼면 그만이고, 책에 묻을 일 없는 저 넓은 책상에서 먹으면 되니 그만 걱정하라는 사장님은 안에서 먹으라 날 설득중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날 보더니 책상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사장님은 물도 주겠다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때다, 얼른 들고 밖으로 나가 먹어야지.


햇살이 좋다. 따끈따끈하게 구워지는 오후 늦바람과 떡볶이 향이 어우러진다. 강원도 시골 구석에서 자란 저는, 태백산맥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바람을 맞고 자란 씩씩이라구요! 쯧, 내 짬밥을 무시하고 말이야. 입짧은 햇님 대신 일요일 햇님이랑 같이 밥 먹어야지, 이게 웬 떡이야.

[아이고, 진짜 기어코 밖으로 나오셨네.]


-헛, 허허허, 허… 그! 제가! 너무 힘들면 제가! 안으로 기어들어갈게요. 신경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네, 그럼.]


터벅터벅 안으로 들어가는 사장님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난 진짜 고집 만렙이다. 손님 밥 챙겨주겠다는 저 착한 양반한테 아득바득 기를 쓰고 나가는 꼴이라니. 얌전히 먹어도 시원찮을 판에.


그렇게 쟁취한 야외 떡볶이 맛은, 말해 뭐해. 꿀맛이었다.


염치 없이 다 먹고 나서 쟁반을 들고갔다. 이렇게까지 손님을 배려해 주셨는데, 뭐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겠다, 싶어 설거지통을 기웃거렸다.


내가 늘 이렇다.


가족이건 연인이건 무언가를 받았으면 나도 그에 상응하는 어떤 것을 돌려주어야 마음이 편하다. 받을 줄 모르는 계산법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유령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애정결핍에서 오는 거라던데. 혹은 인간 관계를 비정상적으로 맺고 있다고 하기도 하고.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사는 게 당연한 세상 이치인데, 그걸 거스르고 얼토당토않은 제 셈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모습이 못났다. 아직 다 자라지 못했다는 뜻이다.


방패막이 센 것이기도 하다. 한 번 기대하고 상처받고 나면 돌이킬 회복력이 적어서 그렇다. 다치고 넘어져야 세 발 자전거에서 두 발 자전거로 넘어갈 수 있다. 아무도 없는 주차장에서 뒷판 한 번 시원하게 갈려 봐야 운전 면허 제대로 배웠다고 한다. 난 혼자 낼 사고조차 두려워 운전대를 잡지 못한다. 면허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런 자신을 미워하면서 어느 순간 우쭐해하지.

어때, 난 이만큼 상처입은 영혼이야. 이런 날 누가 감당하겠어?

웩- 하고 역겨워하다가도 또 되뇌인다.


근데, 그런 나조차 내가 보듬어주고 나르시시즘이라도 걸리지 않으면 세상에는 날 좋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견뎌줘. 너라도.


바꿀 생각 없이 오만한 나도 언젠간 달라질테다- 다아시가 바뀐 것처럼. 운명적인 그런 사랑을 만나면. 그래, 운명같이 거대하고 대책없으며 언제 올 지 모를 미래로 던져놓자. 지금은, 설거지통이나 기웃거리는거야.


[아니요, 이건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서요. 그냥 가시면 됩니다.]


이마저도 박탈당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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