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울증, 북스테이, 과도한 위로는 오히려 독이니까 나도

내 옆에 내가 가만히 앉을 수 있기에 - (5) 이천 오월의 푸른 하늘

by 라화랑

마음속의 부채감을 결국 편의점 커피로나마 갚았다. 혼자서 셈한 값을 약하게나마 지불했다. 깜짝 놀라 커피를 받으며 감사하다고 연신 말씀하시는 떡볶이 용사님께 깊은 박수를 전해드리고 싶다. 점심을 먹고 나니 슬슬 일요일 손님들이 몰려온다. 눈치껏 빠질 시간이구나, 싶어 가방을 챙겼다.


[이제 가시게요?]


-네. 감사했습니다. 여기, 책들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작은 정원을 지난다. 다 쓰러져가는 줄 알았는데, 한가득 둘러안은 분홍 꽃 집을 지난다. '오월의 푸른하늘'이 적혀져 있는 나무 팻말도 지난다. 1박 2일동안 뺀질나게 출석했던 편의점도 지난다. 좀 더 걷는다. '이천' 팻말에 아랑곳 않고 네비게이션만 쳐다보는 여러 차들을 옆으로 걷는다. 5분 정도 걸으면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의자에 앉는다. 내렸던 곳 반대편에서, 강남역으로 가는 버스가 20분 뒤에 도착한다.


돌아갈 시간이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난 돌아가야 한다.

버스에 탔다. 가장 마지막 자리에 혼자 앉았다.

창문에 비친 날 보니 어제 버스에서 눈물 글썽이던 내가 생각난다.

"어린이니까 어린이날에 엄마 아빠 보러 와야지.

얼른 와~ 언제 올 거야? 4일? 5일? 마지막 날까지 있다가 갈거지?"


엄마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친다. 겪어내야 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존재이다, 생각하면서도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그 때 핸드폰이 반짝였다. 카카오톡 메세지다.


-이제 감. ㅃㅃ


-조심히 가구~ 도착하면 연락하구~ 울 둘째 애기 오랜만에 봐서 넘 좋았구~

같이 온 짝꿍한테도 넘 고맙다 전해줘~ 고생했다구~


- ㅇㅇ ㅃㅃ


집의 모든 행사가 끝나고 헤어지는 길인 듯 했다. 아마 KTX를 타고 연락한 거겠지. 나도 돌아가는 길인데, 저기도 그렇네.


안도감이 든다. 나 없이도 저 사회가 잘 굴러간다.


다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면서, 난 뭘 걱정했던 걸까. 가 없으면 속앓이할 엄마의 마음은 누가 풀어주고, 그런 엄마가 답답해 직설적으로 말한 뒤 후회할 언니는 누가 보듬어줘야 하는걸까. 또 저 둘과 관계없이 눈치 없는 오빠는 누가 말려주고, 물이나 한 잔 다오- 하면서 한없이 주물러달라는 할머니는 누가 책임지지?


눈을 감는다. 이어폰도 없이 눈을 지긋이 감았다. 졸리지 않다. 또렷하게 생각이 돌아간다.

누구도 너에게 짐 맡기지 않았다.


남들 마음만 신경쓰던 그 눈을, 이만 내 안으로 들여오자.
지금처럼 이렇게 두 눈을 꼬옥 감으면, 너만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어두운 길을 헤쳐가는 혼자가 외로워 보이지 않니? 지금은 거기에 집중해 보자. 무지 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거야. 넌 횡단보도를 건너는 데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발 밑에 널 붙잡는 다른 것들은 신경쓸 수가 없는 거야. 폴짝, 건너가서 미처 못 건넌 사람을 그 때 봐주자. 너는, 혼자가 아니니까.


너를 지켜보고 있는, 끝까지 네 손을 놓지 않는 한 사람이 있어.






안녕? 난 네 안에서 계속 손을 내밀고 있어.

네가 다른 곳에 한눈 팔 때에도, 널 놓지 않고 있었어.

나는, 너야.
널 챙겨주는 나.
마지막까지 아등바등 발버둥치는 너를 진정시키고 있는, 내 이름은 너야.
마음 속의 너.


악수를 했다.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어깨를 토닥이는 건 좀 부담스러워서, 그렇게 내 곁에 있었다. 도착할 때까지 계속 같이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오늘 오전처럼 똑같이 따스했다.







40분 가량을 달려 버스가 강남역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줄을 서서 탑승하는 사람들에 밀려 버스에서 황급히 내렸다. 사람들이 가득했다. 통이 넓은 바지를 입은 소녀, 아이돌 굿즈를 사는 카페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줄을 선 팬들, 황급히 추리닝을 입고 토익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 구걸하는 거지, 병원 직원복을 입고 어딘가로 향하는 민낯의 직원들이 모두 걸어간다. 땅을 짚고 부지런히 걷는다. 멈출 새가 없이 지하철 역에 도착했다.


집에 돌아가서, 북스테이를 좀 더 기억하고 싶다.


첫 날 들었던 물기 묻은 종 소리를 생각할 것이다.
화가 나거나 직장에서 무력감이 올 때, 퇴근하고 내가 사는 게 맞나 고민될 때 조금 생각하다가 재생할 것이다.
파알랑거리는 소리를 말이다.


keyword
이전 10화우울증, 북스테이, 나랑 내가 화해가 가능할까 -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