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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진단 다음날, 북스테이 새벽, 전쟁 대피 맞이?

(2) 우울증 진단 직후, 죽음이 코앞에 닥친 종로 호모북커스 새벽

by 라화랑

처음으로 정신을 차린 건 후각이었다. 평소와 다른- 책이 가득한 나무냄새에, 불현듯 눈이 번쩍 떠졌다. 비몽사몽, 약에 취한건가. 정신과 약이 이렇게 센가. 판단을 집어치우라는 듯 거리 저 밖에서 다시 한 번 재난방송이 들려왔다. 내가 직장과 학교에서 틀거나 들었던 것과 아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틀었던 음원은 '훈련 상황'이고, 지금 내 귀에 들리는 건 '실제 상황'이라는 것.



왜 하필 밖에서 자겠다고 해가지고선. 황급히 가방을 집고 안경만 쓴 채 잠옷으로 거리를 나섰다. 이 주변 지하 대피소가… 학교? 관공서? … 지하철!


엄마에게 다급히 전화를 걸었다.

내가 스스로 나락에 떨어지는 동안, 세상은 전쟁이란 걸 하려나봐!

전쟁 전 날, 살기 어렵다고 훌찌럭거린 이 어리석고 유약한 생명체야-
진짜 죽기는 싫은거지?


스스로에게 자조하는 내 안의 화랑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조용히 해. 일단 살고 나서 생각하자고!


머릿 속의 빈정거리는 나에게 소리를 꽥 질렀다. 덜덜 떠는 두 손을 붙잡으며 엄마에게 두서 없이 말했다.


"엄마! 나, 나 지금 서울인데 이거 뭐야?

밖에서 민방위 사이렌이 크게 울려.

근데, 이건 훈련이 아니고 실제 상황이래!"


부스스한 얼굴이 한 번에 그려지는, 목이 잠긴 목소리로 엄마는 들이닥친 내 전화를 받아들이느라 바빴다.


-무…뭐어? 너 지금 거기 왜 있어. 아니 그건 그렇고, 민방위 훈련 소리가 들린다고? 왜? 잠깐 기다려봐. 엄마가 tv 켜볼게.


분단 국가의 기본 소양은 만 60대가 넘어야 장착이 되는 건가. 얼추 30년으로 부족한 내공을 엄마는 잠결에도 채워주었고, 내가 듣고 싶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지금 엄마가 tv켰는데, mbc에서는 생생정보통같이 시장 투어 뭐 그런 거 하고 있고 kbs는 노래잔치 한다. 걱정 마~ 뭔가 잘못된 걸 거야. 잠이나 더 자.


너 근데, 지금 어디라고?



황급히 출근해야 하니 나중에 설명하겠다- 어차피 일찍 일어났어야 했는데 잘됐다는 말을 횡설수설 뱉었다.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나는 잠옷 차림으로 채 문이 닫히지 못한 가방을 두 손에 꼭 쥐었다.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이 터덜터덜 뛰쳐나왔던 숙소로 돌아가는 나를 '별 걸 다 본다-'는 표정으로 잠시 쳐다봤다. 어, 그러고 보니 속옷을 제대로 안 입은 것 같은데- 그제서야 생각이 들어 가방을 앞으로 꼭 바꾸어 쥔 채 새벽의 종로 길을 걸었다.



묘했다.


사람들에게 상처받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망친 숙소에서 전쟁으로 홀로 죽게된다고 하니, 가장 먼저 알리고 싶었다.


나, 여기 있음을.
나를 잊지 말라고. 나도 같이 데려가라고.


그건 참 웃긴 일이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순에 헛웃음이 났다.



난 사실, 혼자이고 싶지 않은거다.


머릿속에 자꾸만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아닌 척 하면서, 나는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었던 거였구나. 그러려면 내가 먼저 구조 신호를 보내야 한다. 엄마한테 방금 건 전화처럼. 깨달음에 온 몸이 가볍게 떨렸다. 갑자기 추워진 탓인가- 애써 무시한 채 호모북커스로 다시 돌아왔다.



허탈한 마음 가득한 채 한 번 깨버린 잠은 돌아올 줄 몰랐다. 다만 함께 놀라버린 내 심장도 돌아올 기미가 없어, 이틀 더 병가를 연장하겠다며 부장님께 연락드렸다. 짐을 챙겨 어제 집중력이 바닥나 미처 보지 못한 책을 펼쳤다. 표지가 짙은 보라색에, 남자의 얼굴이 뭉개진 채 덧칠되어 궁금했다. '개인적 기억' 윤이형 소설이었다. 남자가 겪은 연애의 기억이겠거니, 가볍게 생각했다. 연애의 기억이 맞긴 한데- 모든 소설이 그렇듯 생각보다는 의외이고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에는 보다 복잡한 이야기였다. 그 소설에서 내 마음에 와닿은 구절은 주인공의 사랑과 기억이 아닌, 엄마가 집을 나갈 때의 생각들이었다.


[내 마음 속에 있던 '어머니'라는 팔레트는 셀 수 없이 많은 칸으로 나뉘어 있었고, 거기에는 서로 다른 명도와 채도, 색깔을 가진 기억들이 물감처럼 담겨있었다.


'나는 행복한 적이 없었어.'라는 어머니의 말은 명백하게 새까만 빛깔이었고, 보통 사람이었으면 기억의 마지막에 칠해진 그 빛깔이 다르 많은 아름다운 빛깔들을 까맣게 삼켰겠지만, 내게 그건 단지 하루의 기억에 불과했고, 결코 그 날의 칸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으므로 다른 어떤 것도 더럽히지 않았다.]

-개인적 기억, 윤이형, 은행나무 출판사 중 발췌


다른 어떤 것도 더럽히지 않았다-는 문장이 나를 바라봤다.


난 그래. 넌 그렇니? 하고 물어 오는 듯.


내가 고통과 두려움에 가슴치며 아파했던 그 검은 날의 혼탁함, 그건 내 모든 삶을 까맣게 칠해버렸다. 삶의 색을 없애버리고 나는 자꾸만 후회하기 시작해서, 급기야는 나의 탄생까지도 탓하던 차였다. 그 문장은 그런 나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넌 그리 단순하지 않아. 네 아픔은 칸이 있어.
그 칸 안에 담아놓은 눈물은 널 흐리게 할 수 없어.
넌 사라지지 않아.
그 어떤 눈물에도.




체크아웃을 했다. 대표님께 다음날 숙박도 가능하냐 물었다. 단정하고 정갈한 문체의 답장이 왔다. 가능하다고. 되돌아올 피난처를 확보해놓고, 나는 발길을 옮겼다. 그곳에 가려면 빨간 버스를 타야 한다. 그래도 한 번 가 봤다고 긴장하며 버스길을 좇지 않는다. 씩씩하게 시골길을 오른다. 바람에 딸랑이는 종소리가 반갑다. 여전히 데크 한 복판에 누워있는 고양이가 한없이 늘어져있다. 거, 부러운 신세일세. 마음이 아픈 게 나은 걸까, 몸이 아픈 게 나은 걸까 괜히 건강한 고양이가 심술나 살짝 째려봐주고는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 또 왔어요.


[어, 어… ! 그 때 그 떡볶이!]


나를 보고 반갑게 소리친 사람은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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