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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진단 직전-후, 도망칠 힘 제로의 서울 북스테이

(1) 우울증을 드디어 인정한 환자의 도피처, 서울 종로 호모북커스

by 라화랑

지금부터의 모든 글은,

다이어리에 적은 일기를 옮긴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2023년 10월의 시작에 감기와 함께하며,

오랜만의 기침에 헛웃음을 짓는 화랑 드림.





가끔은, 타자 말고 손글씨로 일기를 써야 하는 날이 있다.

쉽게 써지는 유려한 단어들 말고, 힘과 시간을 들여 생각을 꾹꾹 눌러담아야 하는 날 말이다.


나에게는 지난 3일간이 그랬다.






애써 예약한 1인 한옥 공유서재에서 의식할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가만히 놔두었을 때, 그 와중에 시간 아깝다며 노트북에 손을 올렸을 때, 한 자도 쓰지 못하는 내가 한 없이 미울 때. 생각만 했던 그 일을 꼭 해야겠다 결심했다.


인정하기.


아프다. 세상에 말했다. 그래야 잠시라도 삶을 멈출 수 있었다.

나의 상태를 메세지로 적어보내며 더욱 알았다. 심각하구나. 손이 벌벌 떨리고 온 몸이 바들바들, 내 통제를 벗어나 춤을 췄다. 부리나케 무슨 일이냐며 전화 온 부장님의 말씀에 애써 밝게 대답한다는 것이 되려 눈물을 소리 없이 흘리고 있음을 들켰다. 소매를 꼭 쥐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통화를 마치자 미처 다 먹지 못한 밥이 날 오도카니 기다리고 있었으나 배고프지 않았다. 종로 한복판에서 밥 먹다가 전화하고 울면서 뛰쳐나간 여자가 - 식당 주인에게 내가 최초가 아니기를 빈다.

다음날, 정신건강의학과에 갔다. 생각했던 환자와 실제가 달랐다. 생각했던 환자 이미지에 그 안에서 제일 잘 맞던 건- 나였다. 분주히 돌아다니며 약만 줄 수 없냐는 당당한 아저씨, 화장실이 어디냐며 지팡이를 휘두르는 할아버지, 핸드폰 게임에 열중인 아주머니. 울먹이며 병원까지 겨우 도착한 건 나밖에 없어보였다.



간이 검사를 했다. 태블릿으로 체크하는 내내 울음이 왈랑왈랑 차올랐다. 대부분의 질문에 내 대답은 '매우 그렇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30여 분을 기다려 들어간 진료실에는 안경을 쓴, 옛날에 무척이나 이과 전교 1등이었을 것만 같은 외모의 의사선생님이 앉아계셨다. 그는 내게 말했다.


"어- 원래 초진이면 제가 3-40분은 상담하면서 잘 살펴봐야 하는데, 죄송한데 오늘 제 진료시간이 4시 30분까지여서, 상담이 조금 짧을 수 있어요.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병원에 예약을 잡고 또 기다릴만한 상태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어떤 점이 불편해서 여기까지 찾아왔냐고 물었다. 불편… 불편…


[선생님, 가슴이 너무 빨리 뛰어요.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심장이 자꾸만 뛰는데, 길거리 소리가 저한테 다 너무 크고… 다 저에게 와닿는 것만 같고… 그래서 걸어다니기만 해도 세상이 무섭고… 그냥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고… 밥도 먹기 싫고… 심장이 아파서 꾹꾹 누르고 툭툭 쳐야 하는데 머리가 자꾸만 아파와요.]



무슨 말인지 전혀 맥락이 없는 아픔을 호소했다. 아직, 할 말이 이만큼 더 남았지만 왜 그렇게 됐는지 이야기하려면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의사는 바빴고, 나도 그만큼 마음이 다 열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저 내가 원한 건, 약이든 주사든 상관없으니 이 감당 못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켜 달란 거였다.


빠른 시일 내에 또 오기로 예약을 잡고, 알약 이틀치를 받았다.

이게 정말 내 하루를 견디는 데 도움이 될까.


4분의 1쪽으로 잘게 잘린 덩어리들을 믿고 삼켰다. 그 외의 다른 답은 없었기 때문이다.



진료를 받고 나와 짐을 챙겼다. 어제 종로 공유서재에서 하루 북스테이를 신청했었다. 이럴 줄 알고. 집에 가면 얼마나 무기력하게 숨만 쉴 지 알고. 다행히 전 날 예약을 해도 흔쾌히 받아주셨다.


오후의 종로는 밝았다. 초여름 날씨라 무척 더웠으며 햇빛이 반짝이는 여행객을 비췄다. 주말만큼의 인파가 빠진 경복궁역은, 내가 간신히 견딜 만큼 북적였다.


밤늦게 찾아가 대표님도 퇴근한 호모북커스는 낮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밤이 되어 작은 마당에 호롱불이 켜졌다. 은은한 주광빛이 한 뼘 마당을 가득 채운 모습, 날 기다리는 나무와 책 냄새.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 진정되었다. 저녁약을 먹고 커튼을 열어 자세히 오늘 잘 곳을 둘러보았다.


어제 낮에 보았던 책장 그대로에, 1인용 접이식 매트리스와 이불보가 각을 맞춰 접혀져 있었다. 이불에서 뽀송한 향이 났다. 기분이 좋아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하도 울어서 머리가 웽-하고 울렸다. 책장에 책이 많았지만 나는 다 내팽개치고 안뜰로 나갔다. 캠핑의자가 있었다. 무릎을 모아 껴안고 하늘을 봤다. 딱 몇 뼘만큼의 밤하늘이었다. 달이 희끄무레 어둠 속에 함께였다.


내 세상도 딱 저만큼이었으면 좋겠다.
딱 저만큼의 아름다운 하늘만이 내 전부라면,
나는 더 이상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일은 없겠지.



약 체질이었는지, 이 정도 생각이 미쳤다면 이미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야하건만 더 슬퍼지지 않았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약 4분의 1쪽이 막아낼 수 있는, 그 정도의 아픔이라는 거지.

왜 더 심각하기 전에 병원에 가지 않았나, 후회했다.

내부로 들어갔다. 일부러 만들지 못하는, 책과 나무향이 뒤섞인 평안한 내음이 나를 덮쳤다. 향수로 만들어 집에 매일 뿌리고 싶었다. 호모북커스의 책은 모두 대표님의 소장품으로, 판매용이 아니다. 개인이 여러 후원을 받아 도서관 및 공유 서재, 또 때로는 북스테이로 쓰이는 공간이다.



다른 책을 집중해 읽을만큼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가방에서 내 책을 꺼냈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이도우 작가의 로맨스 소설이다. 오늘부로 읽으면 3번째이려나. 다른 사람들은 어떤 책에서 위안을 얻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도우 작가에게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일어서는 사랑'의 기운을 받는다. 사람에게 휘둘려 스스로를 좀파먹은 나에게 최고의 판타지이자 이상향이란, 상처받은 사람들도 살아갈 수 있는-사랑할 수 있는 세계(장일호, 슬픔의 방문 문구에서 가져옴)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마음의 깊이를 헤아려보다가, 이필관 할아버지의 부고에 슬퍼하다 새벽 1시가 넘어 까무룩 잠이 들었다.


웨이이우에엑우에게엥-



국민 여러분, 이 상황은 실제 상황입니다. 이 상황은 실제 상황입니다. 국민들은 모두 지하 대피소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아직 꿈에서 내가 안 깼나. 뭔 꿈이 이렇게 생생하지. 어, 나 여기 내 집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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