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팟을 빼고 안경을 고쳐 쓴 이천 오월의 푸른하늘 북스테이 책방 지기님이 짐짓 큰 소리로 반겼다. 한 번 밖에 안 왔던 북스테이 손님을 어떻게 기억하지? 고민했다가 한국인은 밥심이라고, 때가 맞아 내 점심까지 시켜준 기억이 났을테지 싶어 빙그레 웃었다. 암, 밥 한 끼 함께하면 먼 친척이지! 게다가 민폐 끼치기 싫다며 주인인 본인이 괜찮다는데도 밖에서 먹는 땡깡을 부린 손님은 기억할 만도 하다.
제법 숙련된 손님마냥 여러 책을 둘러봤다. 마침 속편을 예약해놨던 오후도 꿈 이야기가 있길래 냉큼 집었다. 그리고는 무참히 헌책방으로 쫓겨났…다. 사실은 원래 책방에서 하는 과외가 있어 더 넓고 숙박용으로 쓰는 헌책방을 특별히 열어주셨다.
누군가의 집이었던 그 곳은, 옛날식 한옥 시골 대문부터 창고까지 농사꾼이 확실한 전 주인의 인테리어를 크게 바꾸지 않은 골동품과 헌책의 보물창고였다. 오후 햇살은 따사롭지, 손에 든 책은 동화처럼 아름답지, 바람은 살랑거리지… 놀라서 달아났던 아침잠이 이 때다 하고 내 몸을 파고들었다.
잠시만 ,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아볼까.
감았는 줄도 몰랐던 눈이 번쩍 떠졌다.
누가 오면 어쩌려고, 나는 남의 헌책방에서 도롱도롱 어느새 대 자로 누워 취침했다. 나방이 내 머리위로 팔랑거리며 날아갔다. 문 틈으로 유유히 빠져나가는 날개를 보며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어우, 가야지.
아직 과외가 진행중이었다. 나는 잠시 쉬는 틈에 가방을 반납했다. 사장님이 내 짐을 받아들며 물었다.
[가시게요? 저녁은요?]
-엇, 어, 으어… 그, 이제 찾으려고요!
황급히 오른손으로 마을쪽을 푹 찔렀다. 살짝 웃더니 잘 가시라며 인사해주셨다. 오늘 하루, 두근거리는 일 없이 용기내서 잘 돌아다녔군. 집으로 돌아오며 평가한 오늘의 라화랑 건강점수는, 100점! 울지도 않았고, 심장이 좀 떨리긴 했어도 토닥거렸더니 금방 돌아왔으니까. 오랜만에 온 자취방에서 빨래를 두어 번 돌리고, 지쳐 잠이 들었다.
가야지. 진짜 가야 하는데… 발길이 안 떨어지네.
기약 없는 약속은 언제까지 가야한다는 책임감이 없다.그리고 그 사실은 안 그래도 집 밖에 나가기 어려운 우울증 환자를 내원시키는 데 큰 벽이다. 눈을 떴을 때에는 6시, 9시, 10시였는데 널부러진 내 몸이 비척비척 일어나 옷을 입은 시간은 오후 3시가 넘어서였다. 배가 고프지 않으니 아침-점심-저녁을 꼭 맞출 필요가 없었다. 한 번 뒤집어 누워버리면 시간은 어느새 사라지고, 나는 그저 등껍질을 스스로 못 뒤집는 거북이가 되어 누군가가 나를 일으켜 줄 때까지 가만히 있고만 싶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성실한 나라의 화랑이와, 약이 다 떨어져 새로 받아야 한다는 어둡지만 현실적인 화랑이가 두 다리에서 극적인 화해를 이루었다. 이틀만의 병원행이었다. 여전히 나는 무슨 말을 할 지 몰랐으며, 어떤 말이든 해보라기에 그저 생각나는 만큼의 말을 했다. 약을 더 늘리기로 했다. 지금도 원래 환자의 4분의 1 정도라며, 경미한 수준임을 알려주었다. 첫 진료보다는 덜 운 채로 진료실을 나왔다. 10분 가량 있었던 것 같은데, 시계를 보니 30분 넘게 진료실 안에 있었던 듯 하다. 일주일치 약이 나를 좀 더 평상시대로 돌려줄테지. 부적처럼 꼭 붙들고 있다가 가방에 넣었다. 오늘은 입실 시간에 늦지 말아야지- 결심한 탓에 7시보다 10분 일찍 호모북커스에 도착했다.
벨을 눌러도 인기척이 없어 고민하다 안마당 뜰에 앉아 대표님께 연락을 드렸다.
[저녁을 먹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편히 할 일 하세요.]
여전히 멋드러지고 정갈한 문자 어투에 안심하고 밥을 먹으러 다녀왔다.
안뜰에 올려져있던 내 가방이 사라졌다. 설마…? 하고 서재 안에 들어가보니, 예쁘게 앉아있는 내 가방이 짝꿍을 맞이했다. 곽에 담긴 배, 그리고 작은 쪽지.
[화랑님, 드저트로 시원한 배 맛있게 드세요.]
뚜껑 위에는 아동용 캐릭터가 그려진 포크도 함께였다.
저녁을 먹고 오겠다는 간단한 그 한마디 놓치지 않고 디저트 먹으라며 과일을 올려 놓는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따뜻하고 친절한 걸까.그리고 나는 그런 평범하고 다정한 세계를 얼마나 그리워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