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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맞이 완료, 서울 종로 북스테이, 호모북커스에서

(3) 우울증 진단 직후에 다정한 친절을 건네다니요, 울겠습니다- 뿌엥

by 라화랑

-안녕하세요, 저 또 왔어요.


[어, 어… ! 그 때 그 떡볶이!]



에어팟을 빼고 안경을 고쳐 쓴 이천 오월의 푸른하늘 북스테이 책방 지기님이 짐짓 큰 소리로 반겼다. 한 번 밖에 안 왔던 북스테이 손님을 어떻게 기억하지? 고민했다가 한국인은 밥심이라고, 때가 맞아 내 점심까지 시켜준 기억이 났을테지 싶어 빙그레 웃었다. 암, 밥 한 끼 함께하면 먼 친척이지! 게다가 민폐 끼치기 싫다며 주인인 본인이 괜찮다는데도 밖에서 먹는 땡깡을 부린 손님은 기억할 만도 하다.


제법 숙련된 손님마냥 여러 책을 둘러봤다. 마침 속편을 예약해놨던 오후도 꿈 이야기가 있길래 냉큼 집었다. 그리고는 무참히 헌책방으로 쫓겨났…다. 사실은 원래 책방에서 하는 과외가 있어 더 넓고 숙박용으로 쓰는 헌책방을 특별히 열어주셨다.

누군가의 집이었던 그 곳은, 옛날식 한옥 시골 대문부터 창고까지 농사꾼이 확실한 전 주인의 인테리어를 크게 바꾸지 않은 골동품과 헌책의 보물창고였다. 오후 햇살은 따사롭지, 손에 든 책은 동화처럼 아름답지, 바람은 살랑거리지… 놀라서 달아났던 아침잠이 이 때다 하고 내 몸을 파고들었다.


잠시만 ,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아볼까.


감았는 줄도 몰랐던 눈이 번쩍 떠졌다.


누가 오면 어쩌려고, 나는 남의 헌책방에서 도롱도롱 어느새 대 자로 누워 취침했다. 나방이 내 머리위로 팔랑거리며 날아갔다. 문 틈으로 유유히 빠져나가는 날개를 보며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어우, 가야지.


아직 과외가 진행중이었다. 나는 잠시 쉬는 틈에 가방을 반납했다. 사장님이 내 짐을 받아들며 물었다.



[가시게요? 저녁은요?]


-엇, 어, 으어… 그, 이제 찾으려고요!


황급히 오른손으로 마을쪽을 푹 찔렀다. 살짝 웃더니 잘 가시라며 인사해주셨다. 오늘 하루, 두근거리는 일 없이 용기내서 잘 돌아다녔군. 집으로 돌아오며 평가한 오늘의 라화랑 건강점수는, 100점! 울지도 않았고, 심장이 좀 떨리긴 했어도 토닥거렸더니 금방 돌아왔으니까. 오랜만에 온 자취방에서 빨래를 두어 번 돌리고, 지쳐 잠이 들었다.


가야지. 진짜 가야 하는데… 발길이 안 떨어지네.



기약 없는 약속은 언제까지 가야한다는 책임감이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안 그래도 집 밖에 나가기 어려운 우울증 환자를 내원시키는 데 큰 벽이다. 눈을 떴을 때에는 6시, 9시, 10시였는데 널부러진 내 몸이 비척비척 일어나 옷을 입은 시간은 오후 3시가 넘어서였다. 배가 고프지 않으니 아침-점심-저녁을 꼭 맞출 필요가 없었다. 한 번 뒤집어 누워버리면 시간은 어느새 사라지고, 나는 그저 등껍질을 스스로 못 뒤집는 거북이가 되어 누군가가 나를 일으켜 줄 때까지 가만히 있고만 싶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성실한 나라의 화랑이와, 약이 다 떨어져 새로 받아야 한다는 어둡지만 현실적인 화랑이가 두 다리에서 극적인 화해를 이루었다. 이틀만의 병원행이었다. 여전히 나는 무슨 말을 할 지 몰랐으며, 어떤 말이든 해보라기에 그저 생각나는 만큼의 말을 했다. 약을 더 늘리기로 했다. 지금도 원래 환자의 4분의 1 정도라며, 경미한 수준임을 알려주었다. 첫 진료보다는 덜 운 채로 진료실을 나왔다. 10분 가량 있었던 것 같은데, 시계를 보니 30분 넘게 진료실 안에 있었던 듯 하다. 일주일치 약이 나를 좀 더 평상시대로 돌려줄테지. 부적처럼 꼭 붙들고 있다가 가방에 넣었다. 오늘은 입실 시간에 늦지 말아야지- 결심한 탓에 7시보다 10분 일찍 호모북커스에 도착했다.

벨을 눌러도 인기척이 없어 고민하다 안마당 뜰에 앉아 대표님께 연락을 드렸다.


[저녁을 먹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편히 할 일 하세요.]


여전히 멋드러지고 정갈한 문자 어투에 안심하고 밥을 먹으러 다녀왔다.



안뜰에 올려져있던 내 가방이 사라졌다. 설마…? 하고 서재 안에 들어가보니, 예쁘게 앉아있는 내 가방이 짝꿍을 맞이했다. 곽에 담긴 배, 그리고 작은 쪽지.

[화랑님, 드저트로 시원한 배 맛있게 드세요.]


뚜껑 위에는 아동용 캐릭터가 그려진 포크도 함께였다.


저녁을 먹고 오겠다는 간단한 그 한마디 놓치지 않고 디저트 먹으라며 과일을 올려 놓는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따뜻하고 친절한 걸까. 그리고 나는 그런 평범하고 다정한 세계를 얼마나 그리워한 걸까.


세상에나, 나는 그만 뚜껑을 열고 울어버렸다.


싫어하는 배를 포크로 푹 찍어 입에 가득 넣고는,

잃어버린 장난감을 찾은 여자아이처럼 그렇게 왕왕 소리내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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