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가 궁금해할, 그리고 당신 딸이 답하지 못할
우리 엄마가 가장 궁금했던 점, 그리고 내가 아직까지 정확히 답을 모를 질문. 그건 바로 "엄마가 너에게 뭘 도와줄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울증과 공황 장애 같은 정신과적 질환은 감기마냥 해열제 좀 먹고 푹 자면 낫는- 그런 처방적 병이 아니다. 어떤 우울증 환자에게는 가족의 따스하고 무한한 환대, 어마어마한 관심이 필요할 수 있고 그 옆 방 우울증 환자에게는 철저히 외로울 것만 같을 무관심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들은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말하지 못한다. 원래 그런 것 잘 말하는 사람들이었으면 처음부터 우울증이라는 병에 쏙 빠지지 않는다고요. 그러니 나는 바란다. 적당히 눈치껏, 알잘딱깔센 해주시기를. 어려운 것도 안다. 하지만 말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는 나를 적어도 가만히 놔두지는 않기를 바라며- 내 입장에서 써 보겠다. 가족이 해주거나 해주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 일명 우울증 걸린 딸을 위해 필요한 당신의 자세.
1) 나를 너무 어렵게 여기지 말아 줘 :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 지양
내가 우울증이라고 밝힌 순간부터, 나는 그 모든 지위를 잃고 다만 환자가 된 기분이다. 이틀에 한 번씩 전화하던 엄마가 죽어도 먼저 통화하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씩 본가에 내려가지 않으면 '많이 바쁜가 보다?'라며 조르던 사람이 '힘든데 오지 마~'라고 한다. 심지어 명절 때에는 전 부치려고 했더니 '아니야, 넌 가서 쉬어.' 라고 말하고 혼자 장을 봐 오지를 않나. 아니 굳이 하겠다는 애를 밀어낼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어느 정도 나를 배려해 주려는 그 행동과 태도는 잘 이해하겠지만, 내가 바라는 건 이렇게 한 번에 확 전과 180도 다른 행동을 계속 하는 게 아니라고요. 이전 태도에서 잘못된 것들을 하나씩 바꿔나가는 게 아니라, 무조건 전과 반대 행동을 하면 그게 정답일거야- 라고 혼자 예측해버리는 건 너무하다.
2) 그만 불쌍히 여겨 줘: 내 앞에서 울지 마, 나 못 기대니까
"어머니, 저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랍니다." 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다. 전화를 하면 매일 촉촉한 목소리로 "밥은 먹었어? 잠은? 잘 잤고?" 이러면서 대놓고 훌쩍인다. 부담스럽다. 다 내 탓인 것만 같다. 내가 부모님을 슬프게 했구나, 라는 죄책감에 나도 그런 날이면 잠을 잘 못 잔다.
강한 엄마를 원한다. 내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대놓고 땡깡부리고 슬퍼하고 온갖 패악질을 해야 속에 얹힌 응어리와 울음이 토해지는데, 나보다 더 약한 사람 앞에서 어떻게 내 한을 풀겠냐고요. 또 다시 부모님의 눈치를 보느라 나를 꽁꽁 숨기게 된다. 그러니 제발 내 앞에서, 울지 마.
3) 나에게 직접 물어봐 줘, 뭘 원하는지 : 소통을 해 줘
소통 없는 배려는 불편할 뿐이라는 걸, 느끼고 있는 요즈음이다. 뜬금 없이 날라오는 택배들. 숙면에 좋다는 캐모마일 고급 차 세트 한 박스, 김치 두 통, 사골 곰탕 한 박스. 내가 영문 없이 받은 물건들 목록이다. "이게 뭐야?"하고 물어보려고 전화를 한다. 그럼 울음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이게 숙면에/음식 만들 때/입맛 없을 때 좋대-"
...고맙긴 한데, 짜증난다. 잠이 안 온다고 칭얼거리면 그저 그대로 받아줬으면 됐지 그걸 이런 물건으로 보답을 하려 하냐. 내가 널 무한히 신경쓰고 있다는 마음의 표현인 건 알겠다. 다 알겠는데 내가 바라는 건 이런 종류가 아니다.
내가 바라는 건 엄마가 '혹시 요새 힘든 건 없어? 엄마가 어떤 걸 도와줄까?' 라고 직접 물어보는 것이다. 어떨 때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을 수도 있고, 어떤 때에는 정말 김치 한 포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 내가 바라는 걸 받고 싶다. 감정이든 호의든 뭐든. 바라지 않는데 나를 위한다는 행동 속에 [진심으로 나와 소통하고 이해하여 함께 이루어낸 결과물]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게 슬퍼지더라고. 외로워지더라고. 혼자 여전히 세상 밖에 나와 있는 것만 같아서. 내가 바라는 건 접촉이다. 심리적인 접촉. 마음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교류하는 행위.
4) 어느 정도 바뀌려고 노력해 줘, 관심 가져 줘
이건 아빠를 향한 나의 바람이다. 엄마가 180도 달라진 행동으로 나를 곤혹스럽게 한다면, 아빠는 정반대다. 내가 이만큼 마음의 돌을 가장 세게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 아빠 본인은 스스로 많은 반성과 심리적 변화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걸 내가 표현으로 받은 적이 없다. 그러니 난 아빠는 내가 이렇게 힘들다고 했는데도 어째 하나도 노력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냐- 괘씸할 뿐이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곧 이사를 한다- 그런데 아빠는 내가 무슨 집에 살게 될지 왜 이렇게 안 궁금해하냐, 물었더니 왈.
[네가 알아서 구해서 네가 살 집인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아놔 핸드폰 집어던질 뻔. 하지만 이젠 참지 않을 줄 안다. 나는 지랄발광하는 강아지마냥 왈왈 짖었다. 아빠가 돼서 직무 유기라고. 책임지라고. 어떻게 딸이 살 집을 하나도 관심없다고 이야기 할 수가 있냐고.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이렇게 힘든 거 아니냐고. 진짜 짜증난다고.
적어도 말이라도 예쁘게 좀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해 줄 순 없나요, 나의 이 투박한 지방 아저씨여.
지겨워 죽겠어, 정말. 그리하여 나는 이 말에 대한 벌을 주기로 결심했다. 이름하여 엄마 대동해서 내 이삿날 행차하게 만들기. 내가 해내고 만다, 부득부득 이를 갈고 있다.
끝내며
"나는 모두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하늘을 바라보며 텅 빈 눈으로 살 때가 있었다. 그런 포기 앞에 일련의 기대, 희망이 무수히 꺾이는 순간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런 무력한 상황을 바꾸려면 으레 체념하기보다 나도 내 부정적인 감정과 의사 표현을 쉽게 던져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가 바라는 가족은 이런 게 아니니까. 내가 바라는 가족은, 힘들 때 의지가 되고 어려운 일이 있었다고 울 수 있는 끈끈한 사람들이니까. 그런 마음의 안식처와 같은 관계를 새로 만들어내기 위해 나는 부모님과의 관계를 포기하는 대신- 그 앞에서 울음덩어리를 토해내기로 결심했다. 장 보러 간 사이에 혼자 방에서 훌쩍거리며 눈물을 남몰래 닦는 행동 따위, 다시 안하려고 한다.
이제는 말할 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걸 기대할거야."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