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가 궁금해할, 그리고 당신 딸이 답하지 못할
24시간으로 재구성한,우울증 환자로서 삶을 살아갈 때 힘든 것들. 당신 딸의 인생이 이럴 수도 있겠거니 상상하며 힘듦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07:00 기상
눈은 의외로 금방 떠진다. 출근 시간 준수 마음가짐 때문이다. 습관같은 깸. 하지만 우울증 환자는 눈을 뜨는 게 힘든 게 아니라, 침대에서 일어나는 게 고되다. '내가 일어나봤자 뭐하나.', '오늘도 뭣같은 하루 시작이네.'와 같이 생각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 날은 일어날 수 있는 날이다. 그저 나는 두 눈을 잠시 깜빡이기만 했는데, 숨만 한 두 번 쉬었는데 시계가 놀랍도록 빠르게 움직인다. 벌써 8시다. 9시다. 아무것도 생각조차 않았는데- 내가 숨쉬는 이 공간은 시공간이 뒤틀린 방 같다. 두 눈을 깜빡인 시간이 다행히 출근 시간보다 전이라면, 그걸 일찍 알아챘다면 그 무엇보다 무거운 책임감으로 밖에 나갈 준비를 한다. 하지만 샤워도, 옷 갈아입기도 모두 하기에는 힘에 부쳐서- 나는 그 중 하나를 늘 선택하고 만다. 둘 다 해 낼 자신은 없어서.
10:00 출근
어찌저찌 출근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동료들이 나를 의아하게 쳐다본다. 그들에게 물어볼 힘은 없고- 나는 스스로 거울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자괴감에 빠진다. '왜 나를 쳐다보지? 내 얼굴이 더러운가.', '오늘따라 냄새가 나나.', '나도 모르는 새 내가 잘못한 걸 그들이 알고 소문을 낸 건 아닐까. 그 지난주 일.' 지난주 일이라는 것도 사실 별 것 아니다. 예를 들어 커피를 주려고 하다가 바닥에 약간 아메리카노를 쏟았던 일 같은 것들. 모니터를 쳐다보고 집중하려고 애쓴다.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린다. 나는 또 다시 죄책감에 휩싸인다.
12:00 점심
점심 시간이다. 입맛이 없다. 누군가의 무리에 끼어 함께 밥을 먹는 건 그나마 살아 있는 에너지를 모두 쏟아야 하는 일이다. 슬그머니 일어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모르고 밥을 먹으러 갈 때까지 숨을 죽인다. 화장실에서 모두가 조용해진 사무실이 되면 밖으로 나온다. 걸러야겠다.
15:00 상사와의 대화 or 회의
'자기야. 앞으로 다른 회사에서 일할 때도 그렇고, 이런 일이 있으면 일단 완성됐다고 해. 이 프로젝트가 언제까지 완성될 것 같다는 확신이 있잖아. 그치? 그럼 일단 상사한테 다 됐다고 보고하는거야. 그 왜, 알잖아. 윗사람들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거라 이 프로젝트 안 한 사람 누군지 찾아내는 거.'
아, 예. 하고 대답하고 나온다. 또 내가 잘못이다. 나만 안 했다. 다른 사람들은 알면서 왜 가르쳐주지도 않는 거지. 그치- 여긴 학교가 아니라 회사지. 나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지. 이미 부장님은 나를 고깝게 생각하는 것 같다. 어쩐지, 다음 주에 반차 쓰려고 하니까 이상하게 메세지가 오더라. 휴가 일수를 잘 챙겨서 쓰라고. 이미 찍힌 것 같다.
한 시간 뒤 회의, 여러 사람들이 모여있다.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다고 하는데- 갑자기 숨이 잘 안 쉬어진다. 답답하다. 갑갑해 미치겠다. 핸드폰을 들고 거래처에서 전화가 온 척 받는다. 밖을 나서자마자 숨을 몰아 쉰다. 주저앉는다. 눈물을 똑똑 떨군다. 가방 안에 있는 응급 약을 먹는다. 이런 생활을 나는 언제까지 견뎌야 할까.
19:00 퇴근 후 집
드디어 집이다.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눕는다. 배도 안 고프다. 뭐라도 안 먹으면 약을 못 먹어서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 먹는다. 먹다 보니 토기가 올라온다. 싱크대에 음식을 다 버린다. 아, 싱크대가 음식물로 가득 차 더 이상 버리지 못한다. 그럼 변기에 버려야겠다. 화장실에 간다. 화장실도 이상한 냄새가 난다. 언제 청소를 했더라. 오늘 하루 견디느라 힘들었는데 화장실 청소에 주방 청소까지 해야 하다니, 인생은 해야만 하는 것들 투성이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언제 하고 살 수 있지. 근데, 내가 하고 싶은 게 있었나. 이것 봐. 삶은 불공평해. 처음부터 잘 태어났으면 이런 일 없었을 것 아냐. 이 원룸에 갇혀 있는 내가 통탄스럽다.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억지로 눈을 감는다. 이런 오늘 따위, 없는 게 나아.
22:00 침대
악몽을 꿨다. 어디인지도 모를 구덩이로 끌려가는 꿈이었다. 거기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꿈에서조차 괴롭다. 숨을 쉬고 있는 게 고통스럽다. 더 이상 잘 수 없다. 또 다른 악몽이 시작될까봐. 뜬 눈으로 밤을 지샌다.
다음날 07:00
잠을 설쳤더니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벌써 다음 날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끝내며
우울증 환자들은 인지 왜곡이 온다고 한다. 실제로 내가 해낸 것은 보지 못하고, 남들이 하지도 않은 행동을 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마음 속의 지옥을 살아내는 당신의 딸에게- 지옥만도 못한 하루를 떠받치고 있는 누군가에게 말 한 마디- 눈길 한 번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다. 저 하루에 당신은 어떻게 얼마나 개입할 것인가. 혹은 아무 개입도 않을 것인가. 이미 최악의 전투를 마치고 온 자녀 앞에 선 당신, 무슨 태도를 취할 것인지 잘 생각해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