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가 궁금해할, 그리고 당신 딸이 답하지 못할
"왜 그동안 말 안 했어?"라는 질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들어봤다. 하지만 그 누구도 "왜 갑자기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라던가 "왜 딱 그 때였어?"라는 질문은 하질 않더라고. 사실 그게 더 중요한건데. 그래서 자체 고백하는, 내가 정신건강의학과에 다니고 있다는 걸 가족에게 알려야겠다고 다짐한 이유 몇 가지.
1. 살고 싶어서
"이게 다 엄마, 아빠 때문이야!" 소리쳐야 달라진다는 걸 2년간의 상담으로 깨달았다. 나 혼자 어떻게든 노력하고 약도 먹으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 내 우울증의 원인이 '어릴 적 가족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잘못된 자아 형성'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원하는 게 나 하나 변하는 게 아닌, 나와 부모님 그리고 형제자매와의 관계 변화인 것도 알게 됐다. 나를 포기했다가 다시 쥐어보니,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삶을 포기하게 만든 모든 원인들에게 화가 났다. 분노가 가득찼다. 그러니 말을 해야 했다. 소리쳐야 했다.
살고 싶었다. 그 무엇보다 내가 소중한 걸 알게 되어서, 누구보다 나를 1순위로 내가 사랑해주어야 한다는 걸 알아서, 그리고 가족이건 어떤 관계건 나를 아프게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나를 내어주어선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어서. 죽고 싶지 않아서. 더 이상 숨죽인 채로 아프게 살고 싶지 않아서. 내가 나에게 내미는 화해의 신청이란, 부모님께 내 아픔을 공유시키는 것이었다.
2. 하기 싫은 일을 싫다고 해도 결국 끌려간다
[나는 평소와 다른 상태이므로 건드리지 말아주세요]라는 팻말이 좀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 엄마에게는 전혀 통하질 않는다. 가뜩이나 자취를 해서 경기도에 사는 딸이 오랜만에 집에 내려오면 더욱 그렇다. 맛집에 가자, 새로 생긴 카페에 어디가 예쁘더라, 오랜만에 왔는데 산책이나 가질 않겠냐 등 나도 모르는 내 스케줄이 이미 정해져 있다. 무기력해 죽겠는데, 하지만 끈적한 공기에 시공간이 뒤틀린 내 자취방이 지독하게도 싫어서 차선책으로 부모님댁에 왔는데, 쉴 수가 없다! 이 무슨 끔찍한 일인가. 나는 그럼 더욱이 가족들이 싫어지고, 부모님댁과 마음의 거리가 멀어지고 만다. 그러니 내 불량한 태도의 원인을 알려주어야 했다.
3. 날 사랑해 줘, 지금 엉망인 모습일지라도
관심이 필요했다. 돌봐줬으면 했다. 근데 나는 정신건강의학과 환자답게 비상식적으로 혼자 화를 씩씩대며 내고는 실망했다. 말도 안 되는 마음 속의 칭얼거림은 땅굴을 만들고 그 안에 기어들어가 나를 파괴시켰다. 우울증 환자들이 쉽게 하는 [자기 망치기 폭탄!] 전법이다. 내가 알려주지도 않아놓고 혼자서 부모님께 삐지는 일이 일쑤였단 뜻이다. '왜 이렇게 아프다고 티를 내는 나를 몰라줘? 우리 엄마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나봐.' 라면서.
이 놀부 마누라같은 심보를 상담 선생님께서 꼭 집어주셨다. 부모님은 당연히 모를 수 있다고. 그리고 내가 정말 원하는 걸 얻으려면, 부모님께 요청을 해야 한다고. 내가 정신적으로 아픈 환자이니 나를 예전보다 더 특별히 돌봐달라는 요청을 하려면- 나는 아프다는 걸 먼저 말해야 했다.
4. 최후의 수단처럼, 병이 나아질까 기대해서
나도 내 우울증에 지겨워 미칠 지경이었다. 2년동안 정신건강의학과와 상담센터에 드나들었다는 이 한 문장 안에 쏟아낸 돈과 시간이 얼마인지 정말. 제발 언제 낫냐고 나는 의사 선생님께 묻고, 의사 선생님은 늘 로봇처럼 '글쎄요. 워낙 원인과 경과가 천차만별인 게 우울증이라서.'라는 말이나 계속하고. 그런 내가 상담 선생님과의 계속된 상담을 통해 '부모님과의 관계 개선'이 우울증을 타파하는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우울증에 지치고 삶은 계속할 의지를 힘껏 쥔 내가 나를 더 나아지게 할 랜덤 상자를 찾았다면? 당연히 위험을 감수하고 그 상자를 열어보지 않겠냐고요. 뭐가 나올진 모를지언정, 지금보다 나빠질 건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끝내며
결국 나는 부모님께 우울증에 걸렸다는 폭로를 감행했다. 결과는 어떻냐고? 에필로그에 쓰겠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더욱 힘들어졌었지만- 알 수 없던 새로운 빛의 길을 찾아 말도 안 되게 좋아지고 있다. 그러니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우울증 환자 딸래미들이여, 내가 어느 정도 강해졌다고 생각한다면- 혹은 여기서 더 나빠질 것도 없다고 믿는다면- 자신을 믿고, 팡 한 번 터트려보길. 생각지도 못한 방면으로 당신이 나아갈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