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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화랑 Dec 05. 2024

우울증 환자 딸이 답한다(8):몰래 병원 다닐때 장단점

우리 엄마가 궁금해할, 그리고 당신 딸이 답하지 못할

가족 몰래 정신건강의학과에 다니면 단점만 100% 가득할 것 같지만, 난 의외로 장점도 있었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나의 장단점을 한 번 꼽아보겠다. 우선, 장점부터.

장점 1) 평상시와 같은 태도 : 날 환자 취급하지 않는 가족  


'주변에서는 우울증 환자로 비춰지는 내가, 이 가족 세계에서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웹소설 제목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직장이건 친구 사이건 내가 우울증이고 병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관계에서는 나를 어쨌거나 '아픈 환자'로 취급해 준다. 그래서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부둥부둥한 신경쓰임에 지친 나는 가끔 KTX를 타고 본가로 향하곤 했다. 거기에서는 부모님이 설날이 됐다고 전도 부치라 하고, 심부름도 다녀오라고 한다. 밤 늦게 잠 못자고 깨어 있으면 빨리 잠이나 자라고 불을 팍 꺼버린다. 언니는 입맛이 없어 살이 빠진 나를 보고 "올, 다이어트 했냐?" 하고는 만다. 나도 이 사이에서 부대끼고 주말을 보내면 나도 평범한 생활로 다시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잠깐 맛보고 돌아온다.

이번 추석에도 해냈다, 전! 우울증 환자도 예외는 없다 참석하라
장점 2) 병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도피처


장점 1에서 파생된 것이기는 하지만, 의사 선생님께서 보면 머리를 짚고 슬퍼할 일이긴 하지만, 내 병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병원에 다니는 내가 지긋지긋하다. 매일 약을 먹고 잠드는 내가 너무도 위중한 환자같아서, 그게 짜증이 난다. 그럴 때에 가족 품으로 가면 나는 멀쩡한 사람인 척 연기를 해야 하므로- 내게 '너는 환자가 아니야. 여기서 너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막내 딸이야.'라는 암시를 걸 수 있다. 약도 싫고 병원도 싫고, 계속 나아지지 않는 병에 지쳐 잠시 도망치고만 싶을 때 집은 최후의 보루 중 하나였다.

도망치고 싶을 때 엄마아빠 선물 하나씩 사들고 찾아가는 그 곳, 본가
장점 3) 자존감 지킴이 : 네가 뭐가 어때서?!


아무도 내가 어떤 병을 앓는지 모른다. 그런 가족들에게 나는 여전히 멋지고 자랑스러운 딸이다. 그들 눈에 나는 부지런한 청년이고, 젊고, 무한한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는 존재다. 가족들과 이야기를 하다 우울증에 뒤덮인 자기비하가 툭 튀어나오면, 그들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친다. 그리고는 말한다. 너만한 애가 어디있냐고. 너처럼 잘 사는 애가 어디있냐고. 거짓이긴 하지만- 난 가족들의 그런 반응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남들이 보기에 내 삶은- 대단하고 멋진 삶이긴 한가보네? 하고.




단점 1) 내 행동을 이해 못하는 가족들 : 쟤 갑자기 왜저래?

 아무도 내가 어떤 병을 앓는지 몰라서 생기는 단점 중 가장 큰 것은, 나를 아무도 이해 못 해준다는 점이다. 갑자기 잠을 퍼질러 잘 때도,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던 애가 죽어도 엄마랑 같이 장 보러 가기 싫다고 해도 가족들은 나를 의아해한다. 그리고 내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끌고다닌다. '얘가, 지금 귀찮아서 그렇지! 밖에 나가면 누구보다 좋아할 거면서 그래~' 갑자기 생기거나 없어지는 행동들에 대해 댈 핑계가 없다. 나는 나대로 답답하지만 미쳐버린다.

제발 여기 드러누워 하루 종일 숨이나 겨우 쉬고 싶다
단점 2) 약을 몰래 먹어야 함, 서러워 죽겠음


약 먹는 것도 짜증나고 싫은데, 이걸 부모님이나 같이 방 쓰는 언니 몰래 먹어야 한다는 건 엄청난 미션이다. 눈을 피해 물잔을 들고와야 하고- 언니가 화장실 간 새 재빠르게 입 안에 털어 넣어야 한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꼬박 챙겨먹어야 하는 약을 한 두번씩 거르기 일쑤다. 그럼 또 눈물이 나를 맞이한다. 몰래 아픈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이걸 힘들게 해내야 하다니!


단점 3) 죄책감 견디기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알아야 할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내 마음 속에는 또 다른 하나의 자아가 찾아온다. 바로 '죄책감' 자아. 이걸 대체 말을 해야 하나, 언제 해야 하지, 꼭 해야 하나, 근데 안하면 안될 것 같은데. 뭐 대략 이런 생각의 흐름이다. 꼭 시험에서 0점을 맞아 부모님께 싸인을 해야하는 학생의 마음가짐이다. 이 개떡같은 내 채점지를 어떻게 부모님께 보여드려야 하냐고. 나 때문에 머리 싸매고 슬퍼할 가족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데. 너무 죄송한데. 죄책감은 끝도 없이 나를 파고들어간다.


격렬하게 우리 집 고양이가 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님






장단점을 마치며

상담 선생님도 주변 사람들도 의사 선생님도 모두 한 입 모아 말한다. 언제 가족에게 말할 거냐고. 꼭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우울증은 개인의 병이니 말하지 않고도 나 혼자 이겨낼 수 있다고. 그들의 도움 필요 없다고. 

지금은 안다. 그들의 도움은 없어도, 그들의 이해 정도는 필요하다는 것을.

우울증 공부 숙제를 내주는 딸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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