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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칸스 Sep 18. 2021

모두에게 쓰는 편지

오늘의 나를 구할 수 있길

잠잠했던 아픔들이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다. 그 아픔은 서로가 서로를 불러내 아픔을 증대시킨다. 수많은 아픔은 나를 찌르고 그 고통 속에 있는 나는 '차리리 죽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이가 휴식처, 안식처, 충전지로 삼는 가족이라는 집단은 나에게 전쟁터와 같은 곳이다. 굳이 다녀오지 않아도 스치기만 하더라도 피를 흘린다. 나의 숨통을 만들고자 달아나고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 하나로 원상 복귀되는 경우가 많다. 코로나 이전에는 명절에 함께하는 사람들 속에서 웃었지만 외로웠고, 코로나 이후에는 코로나를 핑계로 근처도 가지 않으면서 살만했지만 그래도 외로웠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살만하면서도 비참했다. 남들은 모두 가족 내에서 하하호호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나의 숨구멍으로 찾아온 세상이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 외로움은 잠잠했던 아픔들을 불러온다. 내가 이렇게 아프게 살아왔구나,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왔구나 하면서 살아온 나날들이 나를 찌른다. 수도 없이 찌른다. 지쳐 쓰러져도 찌른다. 너무 많이 찔려 이대로 죽는구나 하여 잠이 드는 순간까지 찌른다. 꿈속에서도 찌른다. 그리고 그 꿈속에서 나는 생을 마감한다. 그렇게 악몽을 꾼다. 



내일 사라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나의 일상은 매일이 아프다. 주변인들이 보는 내 모습은 빛나보일거다. 가족에게 비치는 나의 모습은 속을 통 알 수 없는 이기적인 모습, 항상 무언가를 해내는 모습, 걱정 안 해도 알아서 잘해나가는 모습이고, 친구들에게 비치는 내 모습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모습, 항상 무언가를 해내는 모습, 도전하는 모습, 자유로운 모습이다. 하지만 그건 내 실체가 아니다. 나의 실체는 자유롭고 싶어서 매일 전쟁을 치르고, 겨우 얻어낸 자유를 어떻게든 지키려 하고, 현실 유지를 위해 잠시 자유를 포기하며 괴로워하고, 죽을 것 같은 현실 속에서 살기 위해 아등바등 치는 것이다. 매일 사라지는 상상을 하고, 매일 막장을 달리는 상상을 하고, 매일 다 던져버리는 상상을 한다. 꿈이고 삶의 의미고 뭐고 다 던져버리고 싶을 때가 넘쳐난다. 그렇기에 내일 내가 갑자기 사라진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도 살아내고 있는 게 기적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픔 순간들이 내 가슴을 치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난 가끔 내가 미치도록 부끄러울 때가 있다. 사람들에게는 살아내라고 외치고, 희망을 말하고, 위로를 전하면서 정작 나라는 사람은 매일 사라지는 상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도 겨우 살아내고 있는데, 타인에게 살라고 말하는 것이 참으로 웃긴 일이다.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죽고 싶게 만드는지 뻔히 알면서 그 고통을 아는 자가 고통을 견디는 자에게 더 버텨서 살아내라고 하다니, 이 얼마나 비겁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어쩌면 덜 비겁해지고 덜 부끄럽기 위해 나는 이 매거진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나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댓글 하나 쉽게 단 적 없고, 멘트 하나 쉽게 하려 하지 않는다. 나에게 찾아온 자들에게 고심해서 내뱉은 말에 부끄럽게 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정작 내가 처한 현실은 매일 수도 없이 막장을 달리는 상상을 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상상은 판타지의 세계로 진행된다.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하지만 나의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을지라도 나에게는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세계, 바로 판타지의 세계다. 그 세계에서만큼은 어느 누구의 제약도 없고, 어느 누구도 평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가 창조할 수 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을 만들 수 있고,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갈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운 순간이다. 현실은 고통 속에 있지만, 판타지의 세계에서는 나를 구할 수 있다. 나는 나를 보며 살아내는 자들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는 살아내고 싶고, 어떻게든 나를 구하고 싶다. 내일 내가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오늘 하루는 살아내었다. 오늘 하루의 나를 구했다.



이 글을 있는 모든 사람들 또한 오늘 하루의 자신을 구해낼 수 있기를.


https://www.youtube.com/watch?v=RnWNSAiZXM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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