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당시 윈도우 컴퓨터에 기본적으로 깔려있던 무비메이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는 프로그램 사용법이 적힌 종이를 받아 들고 집에 와서 이것저것 눌러봤다. 검은색 화면에 흰색 글자를 채워 넣고 노래를 넣으니 그럴듯했다. 슬라이드 사이에 애니메이션을 넣었더니 영상이 더 다채로워졌고 슬라이드의 길이를 조절하며 노래의 분위기, 박자, 타이밍에 맞춰 화면을 전환시켰더니 퀄리티가 높아졌다. 이런 식으로 나는 한 동안 내내 빠져 살았고 결과는 아마 은상정도 받았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영상 편집을 잘할 수 있게 됐던 건 저 상을 받기 위해 노력하던 과정보다 그 후에 취미로 영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에 사진을 스캔해서 만들기도 했었고 중학교 때 수행평가를 위해 만들기도 했었다. 맞다 언니가 남자친구 기념일 이벤트로 스톱모션을 만들 때 도와주던 기억도 난다. 그러면서 칭찬도 많이 받고 편집 실력도 많이 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됐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1학년 때부터 문/이과를 나눠서 받았다. 점수 집계는 전교생으로 해서 크게 의미 있진 않았지만 배치되는 선생님들, 과목마다의 분위기 정도가 달랐다. 나는 그냥 별 의심 없이 문과에 갔다. 내 형식상 목표가 선생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웃기게도 문과를 선택했던 나는 타 과목에 비해 모의고사 수학 점수가 좋게 나왔었다. 내신 점수도 수학과학이 제일 좋았던 탓에 2학년 올라가기 전 담임 선생님께서는 날 불러 이과에 가라고 하셨다. 솔직히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 성적으로 문과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2학년 어느 날, 아마 시험기간 즈음이었던 것 같다. 원래 시험기간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고 사소한 것도 재밌고 그런 법이지 않나. 나도 문득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앞으로 뭐 먹고살지 고민이 들었다.
생각을 쭉 해보니 난 영상 편집을 참 좋아했다. 언제 가장 희열을 느꼈냐고 하면 주저 없이 엔딩 크레딧에 내 이름이 올라갈 때였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을 마무리할 때도 친구들에게 사진을 받아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영상을 만들었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남들 공부할 때 영상 제작 동아리를 만들어서 각 반 돌아다니면서 홍보 포스터도 붙이고 면접도 보고 영상 컨셉이랑 필요한 영상들 다 정리해서 팀원들에게 역할분담하고 받은 영상 편집하고 이걸 혼자 다 했었다.
내가 친구가 많진 않지만 없던 건 아니었는데 그때 당시 영상 제작에 관심 있는 친구가 없어서 혼자 해야 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학교 홍보 영상 제작 대회에서 당당히 대상을 탔다.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잘했는데 이걸 직업으로 삼고 싶다 생각한 건 고2가 끝나갈 무렵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왜 이걸 직업으로 가질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한탄스러웠다. 미디어 관련 학과는 다 문과에 있었기 때문이다. 3학년 때 문과로 돌릴까 생각도 잠깐 했지만 현실적이진 않았다. 그럼 일단 이과 안에서 고민해야 했다.
그래서 고른 전공이 컴퓨터 공학이었다. 어쨌든 영상 편집도 컴퓨터 프로그램 만지는 거니까! 나중에 영상 편집이랑 그나마 엮을 수 있는 컴퓨터과로 가야겠다! 가 그때 생각이었다.
결국 고2 말부터 내 모든 생기부는 컴퓨터 관련 내용으로 채웠고 모든 과를 컴공으로 지원한 끝에 대학교에 입학했다.
마냥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