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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Jul 03. 2020

왕따의 기억

세월이 흘러도 추억이 될 순 없다.


왕따를 당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때는 국민학교로 불렀다. 중고등학생도 아니고 초딩이 왕따라봤자 뭐.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남자같이' 생겨서였다. 당시 여자 아이들 사이에 쇼커트 머리가 유행했다. 나는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위해 쇼커트를 쳤고, 미용사 아줌마는 구레나룻을 남겼다.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건 투투의 황혜영 같은 깜찍한 머리 스타일이었는데 김보성을 만들어놓은 것이다.(당시 김보성 님의 이름은 허석이었다)


주동자는 둘이었다. 둘 다 여자였는데 한 명은 말괄량이였고 한 명은 새침데기였다.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말이다. 말괄량이는 나에게 조폭 두목 같았고 새침데기는 행동대장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50명 정도 되는 반 친구들에게 '선영이랑 놀지마, 놀면 맞을 줄 알아'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수업시간 내내 말괄량이와 새침데기는 나를 째려봤다. 나는 그들과 눈이 마주치는 게 두려워 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마저 그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외톨이가 됐고 밥도 혼자 먹었다. 아침이 오는 게 무서웠다.


하필 새침데기와 짝이됐는데 시험을 볼 때 황토색 가림판 밑으로 자꾸만 쪽지를 내밀었다. '몇 번에 답 야?' 식이었다. 새침데기보다 공부를 잘했던 나는 연필로 자꾸 옆구리를 찔리는 바람에 계속해서 정답을 알려줘야 했고, 새침데기는 나보다 좋은 성적을 받았다.


나는 그림을 좀 그렸다. 미술시간에 제일 먼저 수채화를 완성했고 그림을 말리려고 교실 뒤에 스케치북을 두고 화장실로 갔다. 돌아왔을 때 내 그림은 찢어져 있었다. 새침데기의 짓이었다.


한 번은 수업이 끝나고 일어서려는데 내 뒤에 앉아있던 친구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바지 털어. 아까 말괄량이가 네 의자에 침 뱉고 분필가루 뿌려놓았어"


압정을 올려두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미키마우스 원피스를 입고 삐삐 머리를 곱게 딴 말괄량이가 쉬는 시간에 나에게 다가와 눈을 부릅뜨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수업 끝나고 남아라"


나는 그날 무슨 정신으로 수업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하지만 말괄량이는 육상부였다. 운동장에서 나를 붙잡더니 갑자기 자신의 미키마우스 원피스 치마를 활짝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나 오늘 너 패려고 속에다가 바지 입고 왔어. 후문으로 따라와"


옆에서는 새침데기가 히죽거리고 있었다. 나는 공포와 설움이 복받쳐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괴롭히는데! 도대체 이유가 뭔데!"와 같은 내용이었던 거 같다. 그때 같은 반이자 특수반이었던 친구 송지나가 이를 목격했다. 당시에는 지능이 조금 떨어지는 친구를 '특수반'이라 하여 몇 시간은 따로 수업을 받게 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송지나 역시 왕따였다. 하지만 우리 둘은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송지나는 송아지 같은 눈으로 물었다. "왜 울어? 내가 선생님한테 알릴게!"

나는 제발 이르지 말라고 했다.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에. 하지만 송지나는 그 길로 달려가 선생님께 이 상황을 일렀다. 막상 송지나가 달려가니 나는 선생님이 내려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40-5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담임은 송지나의 이야기를 듣고 운동장으로 내려왔다. 말괄량이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후문으로 끌고 가려고 했고, 나는 발을 질질 끌며 버티는 중이었다. 오열을 하며 말이다. '그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 몽둥이를 들고 내려온 담임을 보고 아주 잠깐 희망을 품었다.


담임은 말괄량이와 새침데기를 세워두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 이놈들 친구를 괴롭히면 어떡해." 하고 꿀밤을 한 대씩 먹였다. 그러고 그냥 돌아갔다. 둘은 눈알이 빠질 듯이 나를 째려봤다. 괴롭힘은 그날 이후 더욱 심해졌다.


4학년이면 11살, 나는 불안증에 시달렸다. 항상 고개를 숙이고 다니고 학교에 안 가면 안 되냐고 엄마에게 하소연했다. 엄마가 그 친구를 만나보겠다고 하면 나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나는 보복이 정말 두려웠다. 그렇게 1년을 버티다가 5학년 반 배정 발표를 듣고 나는 심장이 뚫리는 줄 알았다. 말괄량이와 같은 반이 된 것이다. 마지막 탈출구마저 막히자, 나는 집에 와서 세상이 떠나가라 통곡했고 엄마에게 전학을 보내달라고 애원했다. 엄마는 안 된다고 했다.


반전이 있었다. 5학년 새로운 환경이 낯설던 말괄량이는 나에게 친한 척을 하며 잘해줬다. 그러다 진짜 친해졌다. 물론 나는 속으로 그 친구를 끔찍하게 싫어했지만 좋아하는 척을 했다. 1년 간의 왕따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중학교 때는 새침데기와 같은 반이 됐고 어이없게도 베프가 됐다. 난 그녀에게 네가 날 괴롭힌 것 기억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단 하나의 에피소드도 기억하지 못했다.


25년이 넘게 흘러도 생생하다. 가슴을 조여 오는 두려움,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의 절망감. 폭행을 당한 적은 없었지만 사회적 고립의 기억은 여전히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발표도 곧 잘하던 나는 그 이후로 내성적인 성격으로 바뀌었고 모든 일에 조심스럽고 소심해졌다. 추억이라고 부르기엔 억울한 학창 시절의 기억이다. 추억은 미약하게나마 그리움을 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와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끔찍한 폭언과 폭행을 당했던 트라이애슬론 최숙현 선수가 목숨을 끊었다. 그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좁은 생태계는 늘 그렇다. 지도자에게 당했다니 나처럼 작은 희망조차 품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나서 주지 않는 동료들을 원망하지 않았으리라 본다. 왕따를 당했던 당시의 나는 나와 놀아주지 않는 친구들에게 서운했지만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말괄량이와 새침데기를 두려워했을 테니까.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겠지. 괴롭힘의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그 일이 오래 지속되면 '혹시 내가 문제인가'하는 자책감도 들기 마련이다. 스스로를 탓했을지도 모른다. 학교는 반이라도 바뀌고 졸업이라도 있지.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왕따의 기억은 약자와 피해자의 고통을 내 일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살 날이 아직 너무 많은데, 세상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데 온통 상처만 안고 갔을 그녀가 너무 안쓰럽다.  다음 세상이 혹시라도 있다면 괴롭힘의 기억을 묻어버릴 좋은 추억을 그녀가 많이 쌓았으면 좋겠다.



고 최숙현 선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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