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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Aug 24. 2020

가족이 사라지는 기분

그 쓸쓸함


운이 정말 좋은 지, 나는 삼십 대 후반이 되도록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어본 적이 없다. 친한 친구의 부모님이나 형제자매 죽음을 목격하면서 함께 슬퍼하고 울었지만, 가족의 죽음과 견줄 바가 못 될 것이다.


지난 주말 갑작스럽게 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결혼하고 명절 때만 뵀으니 얼굴 본 일이 채 열 번이 안 될 게다. 그런데 주책맞게 울음이 터졌다.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발인을 하고 나서, 그리고 3일간의 장례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와서 남편과 대화를 나누다가 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의 친할머니 할아버지는 모두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이렇다 할 추억이 없었다. 머리가 크고 만난 시할머니는 그래서 특별했을까. 아흔이면 장수이고, 호상이라고들 했다. 짧은 추억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명절 때 빈 손으로 가기 뭐해 선물로 싸구려 홍삼팩을 갔는데 그렇게 기뻐하셨다. 미국에 있는 딸이 보내준 거라며 장롱 속 깊이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10년은 더 돼 보이는 누런 포장지에 싸인 '아이보리'비누였다. 비싼 미제 물건이니 몸 씻을 때 말고 얼굴에만 쓰라는 조언을 덧붙이시며.


명절 음식을 만들고 기름에 절면 시어머니는 매번 근처에 있는 온천에 다녀오라고 하셨다. 그동안 혼자 뒷정리를 하실 게 뻔하므로 죄송했지만 진심으로 씻고 싶었기에 거절하지 않고 다녀왔다. 한 번은 할머니도 모시고 갔다. 나는 시누와 시할머니 앞에서 벗은 몸이 됐다. 뻔뻔하게 할매 등도 밀어드렸다. 놀랄 만큼 하얀 피부에 때가 하나도 나오지 않아 신기했다. 알고 보니 평소에 목욕탕을 자주 가신다고 했다. 할머니는 끝끝내 뒤를 돌아보라며 손주 며느리의 등을 열심히 밀어주셨다. 애틋하고 희한한 경험이었다.


할머니는 정말 건강하셨다. 아흔 연세에 허리가 꼿꼿했고, 속닥거리는 소리까지 다 들으실 만큼 귀가 밝았다. 밥도 한 공기를 뚝딱 드셨으며, 매일같이 지팡이도 없이 노인복지회관에 시간씩 걸어 다니셨다. 모두가 100세까지 거뜬하실 거라고 믿었다. "할머니, 어디 아프신데 없으세요?" 하고 여쭈면, "응, 나는 아픈 데가 없어"하면서 가늘지만 튼튼한 팔다리 근육을 자랑하셨다. 지난 설에 할머니께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인사를 드렸고,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할머니는 자다가 곤히 가셨다. 지병도 없으셨고 평범한 날들이었다. 단지 바뀐 것은 코로나 때문에 몇 달 넘게 그 좋아하는 노인회관을 다니지 못하셨다고 했다. 장구도 치고 노래도 부르며 신나게 놀던 곳을 가지 못해 상심이 크셨던 걸까. 종일 집에만 갇혀있어 기력이 쇠하셨을까.


시국이 이러니 가족장으로 치렀다. 할머니의 딸들은 모두 해외에 계셔서 넓은 장례식장이 민망할 정도로 썰렁했다. 나 포함 가족 여섯 명이 장례식장을 지켰다. 나는 장례식장을 지키는 경험이 처음이었다. 절을 하는 방법도 잘 몰라서 쩔쩔매고 딱딱한 바닥에서 쪽잠을 자는 것도, 멈춰버린 시간을 하염없이 흘려보내는 것도, 화장터로 옮겨진 관이 기계에 실려서 사라지는 장면도 모두 처음이었다. 재가 된 유골을 쓸어 담는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90년의 세월이,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육체가 조그마한 상자 속에 담겼다.


남편이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안고 마지막으로 노인회관 입구와 할머니 방을 차례로 돌았다. 장례식 내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그의 눈이 벌게져있었다. 펼쳐진 이부자리에 할머니가 누워있던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 반갑게 얼굴 보며 인사하던 사람이, 나의 가족이 사라졌다. 며칠 전까지 통화를 했던 엄마와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시고모가 안쓰러워서, 40년 넘게 고집 센 시어머니를 모셨던 나의 시어머니의 혼란한 마음이 걱정돼서, 어릴 적 한 이불에서 자던 할머니를 잃은 남편이 가여워서,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만질 수 없는 추억만 덩그러니 남긴 채 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모조리 없애는 것이 죽음이었다. 가족이 사라지는 기분은 처음이었는데 말라 비틀어진 낙엽처럼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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