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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Feb 01. 2021

어린 조카를 울리지 마세요

어린이는 진지합니다.


인스타 피드를 올려보다가 흥미를 끄는 영상을 발견했다. 엄마가 아이를 '깜짝 카메라'에 담은 내용이었다.


엄마는 화장실에서 큰 소리로 아이를 부른다.



아들아!
화장실로 휴지 좀 갖다 줄래?


여섯 살 남짓된 아이는 엄마에게 두루마리 휴지를 갖다 준다. 엄마는 휴지를 건네받으면서 미리 준비해놓았던 똥(사실은 된장)을 아이 손에 묻힌다.


"어머! 미안해~ 똥이 묻어버렸네. 아이고 어떡하지!"


당연히 뒤집어지며 울 줄 알았던 아이는 예상 밖이었다. 표정은 일그러졌지만 "괜찮아, 닦으면 되지..."하고 의젓하게 수돗물을 틀어 똥 된장을 씻어낸다. 기특하게도 엄마가 무안할까 봐 애쓰는 모양이었다. 옆에 있던 다른 가족이 "똥독 오른다"분위기를 부추겼다. 가까스로 참고 있던 아이가 결국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보며 아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감상했다. 심지어 올케에게도 공유하며 조카에게 한 번 해보라고 했다. 얼마나 귀여운가! 고 어린것이 엄마를 생각해서 울음을 꾹 참아내는 모습이.


얼마 후, 나는 귀가 벌게지도록 부끄러운 마음을 느꼈다. 내가 했던 생각과 행동이 얼마나 어른스럽지 못하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한지 깨닫게 된 것이다.




독서모임 책으로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게 됐다. 필사 모임에서 공유하는 문장들을 읽고 호감을 갖고 있던 터라 기대했다. 책 표지마저 귀여웠다. 얼른 사서 펼쳐보았다.


아바매글 독서모임 3번째 책
어린이를 감상하고 싶어 하는 것. 어떤 어른들은 어린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울리고 싶어 한다. 어린이가 우는 모습조차 귀여워서 그럴 것이다. 그저 장난으로, 어린이의 오해를 유도해서 울게 만든다. (중략) 잠깐이니까, 귀여워서 그러는 거니까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는 대상화된다. 어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p.226


아이를 예뻐하는 나는, 마음과는 정반대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잠깐이고 심각한 문제가 아닐지라도 내 머릿속에는 어린이를 하대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 어린 시절이 많이 떠올랐다. 그 시절, 내가 얼마나 진지했고 인간관계에 고민이 많았는지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동안 나는 너무 '어른'이었던 것이다. 어린이를 배워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책은 어른이 어린이를 배우는 책이다.


저자인 김소영은 어린이 책 편집자로 일하다가 '어린이 독서교실'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다. 누구보다 많은 어린이를 만났고 어린이를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는 어린이에게 늘 정중했다.


존댓말을 들은 어린이는 살짝 긴장하면서도 더욱 예의 바르게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마치 그런 대화가 몸에 밴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것 같다. 어떤 어린이는 내 인사에 야구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네, 안녕하세요"라고 답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저절로 얼굴이 분홍색이 되고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럴 때 조심해야 한다. 절대로 귀여워하는 표정을 지으면 안 된다. 매번 대단한 자제력을 요구하는 일이지만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른이니까.

- 같은 책, p.194


저자가 들려주는 어린이와의 에피소드는 눈 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고 공감이 되어 재미있다. 어린이의 사려 깊음에 몇 번이나 코가 찡해졌으며, 순수한 발상에 웃음이 피식피식 나왔다. 하지만 웃음을 참아야 했다. '어린이는 진지하니까'



어린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다


어른 눈에나 어린이가 귀엽지, 어린이는 지금도 치열하게 살고 있다. 어릴 적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네 언니 오빠들과 '술래잡기 놀이'를 했을 때였다. 우리는 그 놀이를 '낚시터 놀이'라고 불렀는데 술래는 낚시꾼이고, 술래가 아닌 아이들은 고등어, 갈치, 삼치 등 물고기였다. '요이-땅!'과 동시에 물고기인 나는 낚시꾼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있는 힘껏 도망쳤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느림보인 나는 10초도 안 돼 덜미를 붙잡혔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낚시꾼 '오빠'가 내게 말했다.


"넌 잡혔어! 이제 매운탕이야, 저리 빠져."


나는 낚시놀이를 더 하고 싶었지만 매운탕이 돼서 끼워주지 않았다. 서러웠다.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 나보고 매운탕이래!" 오열은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됐다. 지금이야 어이가 없지만 그때는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던가. 얼마나 놀고 싶었던가. 게다가 사람보고 매운탕이라니 자존심이 상했다. 다시는 그 오빠와 놀지 않겠다며 이를 갈았다.


이 책에는 어른 눈으로 보기에는 엉뚱하고 귀엽지만 제 앞에 놓인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어린이들이 나온다.


어린이들은 너무 긴장한 채 서로서로를 격려하며 지하철 개찰구를 빠져나온 어른에게 "무섭지 않으세요?" p. 50
"드래곤나물인가 그랬어요. (잠시 고민) 맞아요, 드래곤나물. 조금 용처럼 생겼어요." p.223


지금은 의식조차 하고 통과하는 지하철 개찰구가 어린이에게는 용기가 필요한 모험이었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어릴 적 그랬다. 회전봉이 돌아갈 때 그 틈에 혹시나 낄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는 심호흡을 몇 번씩이나 해야 겨우 발을 뗄 수 있었다. 그마저도 내리는 타이밍을 잘못 잡아 넘어진 적도 있다. 곤드레나물을 드래곤나물로 착각할 수 있다. 어린이는 처음이고 생경하다. 우리가 해외여행에 처음 갔을 때 너무 다른 문화에 당혹스러웠듯 말이다.


이 책은 그 점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잊고 살았던 '전지적 어린이 시점'을.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가 아니다


나는 대학에서 '청소년 지도학과'를 복수 전공했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과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청소년은 우리의 미래가 아니야. 현재를 사는 주체이지'. 뒤통수를 맞은 듯 충격에 휩싸였다. '청소년은 우리의 미래입니다.'라는 슬로건은 TV에서도 수없이 보았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만큼 당연한 소리 아니었던가.


그렇게 놀라운 사실을 깨달아놓고 어린이까지는 그 범위를 확장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란! 그래, 청소년뿐만 아니라 열 살, 열덟살, 이제 막 뒤뚱뒤뚱 걷기 시작한 두 살 내 조카들 역시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사는 한 인간인 것이다.


'피어 보지도 못했다'는 표현이 있었다. (중략) 내가 아는 삶은 그런 게 아니다. 삶의 순간순간은 새싹이 나고 봉오리가 맺히고 꽃이 피고 시드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지나고 보면 그런 단계를 가졌을지 몰라도, 살아 있는 한 모든 순간은 똑같은 가치를 가진다.

-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p.163


이런 험악한 세상에서 아이를 키우느니 '아이를 낳지 말자'라는 사회를 향한 보복과도 같은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를 일깨워준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말속에 어린이를 완전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 고정관념이 녹아있다는 사실을 매번 일깨워준다.


사회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으니 주지 않겠다고, 벌주듯이 말하면 안 된다. 이 말은 곧 사회가 자격이 있으면 상으로 아이를 줄 수도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런 것이 아니다. 어린이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는 말은, 애초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그 끝이 결국 아이를 향한다. 아이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된다.
- 같은 책, p. 218




저자 김소영은 '찐 스승'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얼굴도 모르는 저자의 매력에 빠졌고,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저자는 그야말로 '참 교육자'였다. 일방향으로 가르치는 권위적인 스승이 아닌, 양방향으로 진짜 소통을 하는 사람이었다.


놀이터에 어린이들이 있다 싶을 때 다가가 보면 언제나 하준이가 있다. 나를 알아보고 달려와 인사할 때 보면 땀 때문에 머리카락이 이마에 딱 달라붙어 있다. 몸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날 지경이다. 때로는 공을 차느라 급해서 멀리서 내게 손만 흔들어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땐 마주 손을 흔드는 나까지도 싱싱해지는 것 같다.

- 같은 책, p.62


아이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그런 아이와 교감을 나누는 일이 '나까지도 싱싱해진다'는 사람이다.


정답을 알려주기보다는 책 속에 꽤 많은 것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참 스승이랄까.


나는 어린이가 글을 쓰다가 모르는 글자를 물어보면 되도록 책에서 찾아서 가르쳐 준다. '책에는 뭐가 많이 있다''선생님도 책을 보고 알게 됐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 같은 책, p.69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어른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녀는 정글짐에서 눈을 감고 잡기 놀이를 하는 어린이가 한 말에서 그 정답을 찾았다고 한다.



"밑에 모래가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


여럿이 어울려 놀다가 억울한 처지가 되어 보고, 박수도 받아보고, 믿기지 않는 승리나 아까운 패배를 경험하는 것은 어떤가. 같은 편이 되고 싶지 않던 아이와 한편이 되어 보고, 힘을 합치고, 의외로 손발이 맞아 가까워졌다가 다시 실망하고 다시 기대하는 것도 소득이 아닐까? 복잡한 감정들을 곱씹으면 집에 갔다가 다음 날이면 모든 것을 깨끗이 잊고 어린이는 다시 놀이터로 달려 나간다.

- 같은 책, p.61


어린이가 연약한 존재라고 모든 걸 대신해줄 필요는 없다. 다만, 어린이를 '과도기적인 인간'으로 보지 말고 완전한 인격체로 보아줄 것. 그리고 존중할 것.


이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사회적 소수나 약자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 책을 모든 어른에게 추천한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를 더 휼륭하게 기르게 될 것이다. 아이가 없는 나같은 기혼자는 어린이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읽어보면 좋다. 잊고 살던 어린시절 자신의 모습을 만나고 꽤 흐뭇할 것이다. 그 시절, 우리가 얼마나 순수하고 진지했는지- 어린이였던 적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니 말이다.



세상에는 어린이를 울리는 어른과
어린이를 웃게 하는 어른이 있다.
어느 쪽이 좋은 어른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중





Q. 다들 '노키즈존'을 어떻게 바라보는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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