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평맛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밥 May 20. 2021

현직 변호사가 작정하고 벗겨낸 법원의 민낯

<불량 판결문>을 고발합니다


뉴스를 보다가 종종 혈압이 올라 TV를 꺼버릴 때가 있다.


뭐? 형량이 저것밖에 안 된다고!

잔인한 아동학대, 성폭행, 살인까지. 누가 봐도 중 범죄에 내려진 깃털처럼 가벼운 형량. 술을 먹었다고 벌을 깎아주는(?) 심신 미약 감경까지.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손을 들어주는 듯한 법원 판결에 다들 분노를 한 번씩은 느껴봤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밑도 끝도 없이 법원에 불신이 컸다. 법적 문제에 휘말리지 않는 편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그 믿음은 더 굳어졌다.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은 법보다 돈이로구나, 법망에 이렇게 허술한 구멍이 많구나, 앞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겠구나, 하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누가? 현직 변호사가.


불량 판결문을 중심으로 법과 법원의 구조적 문제점을 파헤친 책!



존경하는 재판장님, 아니 변호사님!


<불량 판결문>은 최정규 변호사가 작정하고 쓴 책이다. 전직도 아닌 현직 변호사가 법원을 속된 말로 '깐다'. 저자는 공익 법무관을 마치고 대한 법률구조공단 소속 변호사를 거쳐 개업한 변호사로 15년 동안 법조계에 몸을 담은 사람이다.


나는 10년 넘게 몸담았던 방송계의 민낯을 에세이집 <오늘 서강대교가 무너지면 좋겠다>에 웃프게 담은 바 있다. 방송계의 부당한 노동 구조를 적나라하게 까발렸는데, 내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솔직히 방송계에 미련이 없어서가 크다. 하지만 최정규 변호사는 현직이다. 앞으로도 자신이 몸 담아야 할 직장을 상대로, 그것도 판사의 '판결문'이 이렇게나 불량하다, 법원의 서비스가 이토록 불친절하다고 당당히 말하는 소신.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이 책은 실제로 이슈가 됐던, 혹은 알려지지 않았던 '불량한 판결문'을 소개하며, 왜 불량했는지, 무엇이 문제이고 부당한지,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를 따갑게 비판하고 있다. 어쩌다 그런 판결이 났는지 그로 인해 누가 피해를 보았고 무엇이 문제인지, 판결을 뒤집으려고 어떤 시도를 했으며 결국 좌절된 이야기까지.


처음엔 '법'관련 책이라 조금 어렵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다행히 책은 그렇지 않았다. 사례 중심으로 저자의 의견이 서술되었고, 용어 역시 어렵지 않아 나 같은 법.알.못에게도 술술 읽혔다.




이 책은 크게 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악법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에서는 법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재생산되는지, 2장 '국민이 법원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에서는 갑질이라고 느껴질 만큼 안하무인 법원의 불친절함, 3장 '상식에 맞지 않는 불량 판결문', 4장 '쉽게 편들 수 없는 논쟁의 판결, 그리고 법'에서는 법의 사각지대와 허술함, 5장 '불량 판결문, 어디에서 A/S 받나요?'에서는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만한 상식, 저자가 제시하는 불량 판결문 대안이다.



악법이 탄생하는 과정


흔히 법은 국회에서 탄생한다고 알고 있지만, 법이 정착하는 데는 법원의 역할이 컸다. 한 번 내린 판결은 선례로 남기 쉽고, 이는 후에 발생하는 판결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민이 요청해서 법안이 마련되어도 국회 논의 과정에 쓰레기통에 처박히기 일쑤. 국회에서 계류된 법안 중 실제 법으로 탄생하는 비율은 10%대라고 한다.


'1+1=2'처럼 명쾌하면 좋으련만, 법의 영역은 수만 가지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니 단순하지가 않았다. 필연적으로 억울한 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판결하겠지만 피치 못하게 판사의 경험치가 들어가는 일도 생긴다. 층간소음 문제로 법적 분쟁이 생기면 그것을 당해본 판사와 단독주택에 사는 판사는 서로 다른 판결을 내릴 수 도 있는 것이다.(p.33)


그래서 저자인 최정규 변호사는 판례를 확인하고 숙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분쟁 자체를 선입관 없이 보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판례가 이렇네"하고 넘겨버리는 순간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사회적 약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기에, 판사를 설득하는 논리를 개발하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판례는 힘 있는 자들의 논리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판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생각을 멈추고 재고하지 않는 건 '기득권의 논리에 세뇌당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에 닿았다.

- 최정규 <불량 판결문> pp.37~38


비단 법조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직장인이라면 '그동안 원래 이렇게 해왔으니까'하는 안일한 생각을 마주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서 혁신을 논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아무리 그동안 해왔던 일이라도 새로운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법원 판결은 한 사람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신중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아세요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법정을 드나들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토록 불친절한 시스템과 서비스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불량 판결문>에 따르면, 오매불망 기다렸을 공판기일을 하루 전날 취소 통보하는 일도 흔하다. 왜 미뤄졌는지 한 줄 설명 없음은 물론이다. 상사의 눈치를 보며 휴가를 냈을 의뢰인에게 그 어떤 미안함도, 배려도 없다.(p.50) '연기가 됐어, 그냥 그런 줄 알아'하는 태도다. 살면서 일정이 미뤄지는 일은 누구나 겪을 수 있지만, 최소한 그 이유라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의뢰인은 몇 달 동안 노심초사 그 날만을 기다렸는데 말이다. 법원장이랑 오찬을 하느라 재판에 30분 지나도 안 나타나는 판사는 도리어 당당하다.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법원이 이 정도로 상식이 안 통한다면 어떻게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3천만 원쯤이야, 그냥 넘어갑시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안 황당한 사실. 상대방과 금전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소송을 하면 '소액 사건'의 경우, 법적으로 '왜 그런 판결이 났는지 밝히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소액이 3천만 원이었다. 누군가에겐 연봉일 금액이다. 그러니까 내가 금전적으로 억울한 피해를 입어도 3천만 원이 넘지 않는 '소액'이면 항소를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왜? 이유를 알아야 항소를 할 것 아닌가!


'소액 사건'을 따로 분류하는 이유는 사법부 인력이 부족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소액 사건이 민사소송의 71%를 차지한다고. 소액으로 싸우는 사람들은 오히려 한 푼이 아쉬운 저소득층 일 텐데(p.100) 정작, 법이 필요한 그들의 권리 구제를 무시하는 일이 작금의 현실이다.



변호사의 말 못 할 고민


한편, 책에는 변호사가 느끼는 딜레마도 진솔하게 담았다. 화성 연쇄살인범으로 몰려 이춘재 대신 억울하게 20년 동안 옥살이를 한 윤성여 씨. 그의 무고를 입증한 재심 변호사는 현재 영웅대접을 받고 있다. 늦었지만 굉장히 훌륭한 일을 해내셨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는 사람이 아직도 분명 더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흉악범(이라고 보이는)을 변호하면 돈만 좇는 밉상 변호사로 보일 수 있어, 변호사들이 나서기가 힘들다는 점을 저자는 언급했다. 법을 바라보는 우리 역시 균형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새롭게 깨달았다.


수사와 재판을 받는 피고인이라면 누구나 변호인의 조력을 충분히 받아야 한다는 것도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다.

- 최정규 <불량 판결문>, p.141



 '불량 판결문'을 줄이는 방법, 즉 해결 대안으로 저자는 법원의 핵심 구성원 법관의 선발과 평가, 해임 전 과정에 국민의 의견이 반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미국의 주 법원은 법관 선거제가 일반적이라고 한다.


보다 현실적인 대안으로는 재판에 임하는 일이 생기면 되도록 녹음이나 속기 신청을 하라고 권유했다. 혹시 모를 사항에 대비해 기록하는 것도 있지만, 판결 과정을 기록한다는 자체가 조금 더 신중하고 예의를 차린 재판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 후반에 가서는 다소 생뚱맞은 흐름도 발견했다.(p.193) '소년 사법의 연령대를 낮추는 게 효과적인 방법일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딴 길로 샜다. 한 현직 판사가 칼럼에서 재판받는 청소년들의 외모를 평가하는 글을 기고한 것을 예로 들며, 이런 판사를 국민이 어떻게 신뢰하겠느냐라는 의견이 이었다. 그 판사가 전체 판사를 대표하는 인물이 아닐뿐더러, '연령대 기준을 낮추는 것'과 별개인 문제를 억지로 엮어낸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이 책을 읽고 답답했다. 저자 최정규 변호사가 말한 해법이 금방 이루어지지 않을 거 같은뿐더러, '여전하구나'하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추천한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껏 살아라. 튀지 마라. 뒤로 빠져라." 살면서 최정규 변호사가 내내 들어왔던 말이라고 한다. 이 책은 내게 직업의식을 확고하게 지켜가는 품격 있는 변호사의 전기처럼도 느껴졌다. 거대 권력에 맞서 서툰 꿈틀거림이라도 지치지 않고 밀고 나아가는, 근사한 인간이 아직 우리 곁에 있다는 자체만으로 위안이 됐다. 이 책을 읽고 그의 말대로 '꿈틀거림을 멈추지 말아야겠다'하는 불끈거리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한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인용한 구절로 마무리한다.



어떤 일이 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 일은 서투르게 할 만한 가치도 있다.

G.K 체스터턴


매거진의 이전글 어린 조카를 울리지 마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