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밥 Apr 19. 2021

사랑을 의무감으로 하세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사랑 때문에 롤러코스터를 타고 온탕 냉탕을 쉴 새 없이 오가던 20대 후반이었다. 정신 못 차리던 그때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노래가 하나 있다.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가끔씩은 사랑한단 말로 서로에게 위로하겠지만 그런 것도 예전에 가졌던 두근거림은 아니야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레임을 찾는다면 우리가 느낀 싫증은 이젠 없을 거야

주말이 되면 습관적으로 약속을 하고 서로를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을 하지 가끔씩은 서로의 눈 피해 다른 사람 만나기도 하고 자연스레 이별할 핑계를 찾으려 할 때도 있지

015B <아주 오래된 연인들>


3년 정도 사귀었던 연인이 우리 사이 같다며 흥얼거리던 노래. 그러냐며 쿨한 척 웃음 짓고 넘어갔지만 가사를 곱씹던 내 가슴은 짓밟힌 케이크처럼 문드러졌다. 내 맘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아, 당신은 그런 생각으로 나를 만나는구나' 나는 상처에 스스로 소금물을 끼얹듯 계속해서 곱씹었다.


의무감으로... 의무감으로...


의무란 무엇일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의미를 살펴보면,

의무: 사람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일. 곧 맡은 직분.
책임: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


언뜻 비슷해 보이는 책임과 구분해보려고 하니 말장난 같은 뜻풀이가 나온다. 국어사전은 대부분은 유용하지만 이처럼 가끔은 뒷목을 잡게 할 때가 있다.


의무와 책임이란 단어 뒤에 '감'을 붙여보면 어감이 조금 더 또렷하게 다가온다. 의무감과 책임감. 의무감 앞에는 보통 전제가 붙는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선생이라면 마땅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마땅히. 애인이라면 마땅히. 코로나 시대에는 마땅히 마스크를 쓸 의무가 있다.


책임감은 보통 긍정적인 평가로 쓰인다. 너는 책임감이 참 뛰어나다.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해라.


같은 상황을 놓고 비교해볼까.


"나는 그녀에게 의무감을 느꼈다."

"나는 그녀에게 책임감을 느꼈다."


전자가 어쩔 수 없이 멱살 잡혀 끌려가는 느낌이라면, 후자는 자발성이 보인다. 성실하고 바른 이미지다. 의무감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발성'이 소실돼 있다. 자발성이 빠진 사랑에 어떤 가치를 찾을까. 자발성이 빠진 사랑을 이어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015B는 둘을 갈라놨다. 나는 015B에 빚졌다. 덕분에 책임감 있는 반려자를 만났으니.


사전에서 의무나 책임은 비슷해 보이지만, 우리가 딛고 서있는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맥락이 있다. 한 사람이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는 지를 제대로 알려면 앞뒤 상황, 옆까지 두루 살펴야 하고 추적하기 작하면 유년시절 역사까지 들춰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어떤 역사 때문에 의무감으로 사랑을 소비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 속을 파악하는 건 의무와 책임이라는 단어를 구분 짓는 보다 훨씬 더 어려울 작업이다. 다만, 사랑은 의무감으로, 봉사로 하는 게 아니란 것은 안다. 그렇게 지속하는 사랑은 당사자는 물론 상대방에게도 아무런 감응이 없기 때문이다. 공허한 습관일 뿐이다. 나와 상대 인생에 무책임한 태도다. 적어도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그것만은 알겠다.



지금 당신의 사랑은 어떤가요.








내일, 캐리브래드슈 작가님은 '스물아홉'과 '서른아홉'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모호한 경계에 선을 긋고 틈을 만드는 사람들! 작가 6인이 쓰는 <선 긋는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구독해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