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으로 쓰면 어떤가요
오후 2시, 정미영 씨는 머리를 휘날리며 뛰어와 책상에 자리 잡은 연필꽂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연필과 펜, 형광펜, 색연필 등 여러 가지 필기구가 모여 있는 이 곳에서 그들은 오늘 누가 뽑힐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저번에 뽑힌 형광펜은 그녀가 파일에 끼워 놓은 채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 한동안 돌아오지 못했고 옆자리 박 대리가 빌려간 3색 펜은 주머니에서 빠져 자동차 안에서 굴러다니다가 그의 여자 친구 손으로 넘어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바깥세상에 나가 자신의 활용도를 자랑하길 원하는 펜은 자신이 뽑힐 것이라며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래도 역시 필기구 하면 나 같은 펜이 최고지. 중요한 걸 쓸 때에는 꼭 내가 쓰이잖아. 계약서에 서명할 때도 나를 쓴다고."
좁디좁은 연필꽂이 안의 바로 옆에서 연필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며 말한다.
"미영 씨는 펜으로 쓸 때 틀리면 그냥 죽죽 그어버리던데? 연필로 쓰면 지우기가 얼마나 좋다고. 마인드맵이나 스케치를 할 때도, 계산을 할 때도 연필을 쓴단 말이야."
"연필로 쓰다가 손에 닿으면 번지는 거 몰라? 게다가 지우개로 지우면 가루가 얼마나 나오는데. 지우개질 하는 거 생각보다 팔 아프다. 그리고 지워도 처음 그대로 돌아오지도 않아. 종이에 눌린 자국이 남는단 말이야. 펜은 왜 못 지워? 수정테이프도 있어! "
"펜은 뭐 안 번지는 줄 알아? 그리고 수정테이프으?? 그걸 지금 지운다고 표현하는 거야? 그게 더 표시가 나겠다! 그 위에 글씨를 다시 쓰다가 날카로운 펜촉이 겨우 덮어둔 수정테이프를 찢어버리면 진퇴양난이라고."
" 확실한 건 자꾸 고치거나, 지워야 할 일은 연필로 쓰고, 지워지지 않길 바라는 일은 바로 나, 펜으로 쓴다고."
"그래도 사랑은 연필로 쓴다잖아. 사랑을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지워야 하니까. 진한 잉크로 사랑을 쓰면 지우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미영 씨가 연필꽂이에서 찾아낸 건 바로 딱풀이었다. 딱풀은 한 마디를 남긴 채 멀어져 갔다.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지울 생각을 하면 어떻게 해. 나랑 종이처럼 딱 붙어있지 못할 망정."
펜은 틀릴까 봐 긴장은 되지만 완벽하게 쓰고 싶을 때 선택하는 반면, 연필은 언제든 지울 수 있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쓸 수 있는 대신 미완성의 기분이다. 연필로 쓰는 것이 너무 편안하지는 않고 펜으로 쓰는 것이 너무 조심스럽지 않은 균형의 삶이 좋다.
연필로 쓴 것을 지우개로 지우는 것이 차라리 낫지. 힘들고 슬픈 기억은 왜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을까? 잊어버리려고 하면 오히려 더 떠오른다. 지우개로 벅벅 계속 지워봐도 종이에 새겨진 자국이 상처처럼 없어지지 않듯이 말이다. 그럴 때는 어쩌면 수정테이프로 차라리 덮어버리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랑은 연필도, 펜도 아닌 디지털로 썼으면 좋겠다. 삭제 버튼으로 지워버리면 영원히 사라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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