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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Jan 26. 2022

'글쓰기 노가다'의 기쁨

비생산적으로 일하면 안 되나요



부를 쌓으려면 '파이프 라인'을 구축하라고들 말한다. 즉, 내 시간 안 들이고 알아서 돈이 굴러들어 오는 시스템을 만들라는 뜻이다. 온라인 시대와 잘 맞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유튜브나 블로그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한 번 콘텐츠를 올려두면 매달 정산이 다(인플루언서라고 치자). 즉, 한 번의 노동이 N번의 수익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VOD 강의, 전자책도 마찬가지다. 촬영할 때, 책을 쓸 때는 고되지만 그것을 플랫폼에 올려두고 사용자가 결제를 하면 꾸준히 이익이 생긴다. 이런 파이프라인을 여럿 구축해서 돈을 모아야 하며 내 시간을 직접 투자하는 일은 비생산적이고 시대에 뒤처지는 일로 여긴다.


글로 밥 벌어먹은 지 올해로 15년 차. 나는 글 쓰는 노동자다. 지난 십여 년은 주로 방송글을 썼고, 요즘은 주로 글쓰기 모임을 기획하고 운영하며 강의를 한다. 내가 하는 일은 '부의 파이프라인'과 오히려 반대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이 닿지 않는 구석이 없다.


이번 달 글쓰기 모임을 테마를 정하고 4주 차 커리큘럼을 기획한다. 커리큘럼은 매달 조금씩 바뀐다. 왜냐하면 내 글쓰기 모임원 90%가 기존 참여자기 때문에(그만큼 만족도가 높다나 뭐라나) 똑같은 커리큘럼을 반복하기는 미안하다. 커리큘럼을 노션에 구축한다. 소개 글, 상세페이지도 작성한다. 어울리는 이미지도 찾아 페이지를 꾸민다. 회원을 모집하여 그의 이름, 블로그 주소 등을 하나하나 복사-붙여넣기해서 회원 리스트를 만든다. 회원을 모집할 때는 어떤가, 블로그에 모집 글을 쓰고 인스타그램에 홍보할 카드 이미지를 만든다. 이미지 아래 넣을 모집 문구를 SNS에 맞게 작성해서 업로드한다. DM이나 카톡 채널, 블로그 등에 수시로 문의사항이 들어오면 빠르게 답변한다. 단톡방을 만들어 공지사항 문구를 만들어 올리고, 회원들과 자기소개를 나눈다. 2년 동안 매달 했던 일이다.


ZOOM에서 만나는 독서모임은 또 어떤가. 책을 읽고 발제문을 만들고, 실시간으로 회원들과 만나 토론을 진행한다. 올해부터 에세이 합평도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회원들을 만나 합평과 피드백을 진행한다. 피드백을 진행하기 전에는 무엇을 하느냐. 강의 자료 PPT를 만든다. PPT를 만들기 전에 무얼 하냐, 회원들이 보낸 에세이 파일을 열어 첨삭한다.


글밥의 글쓰기 첨삭 파일

신청자는 섬세한 피드백에 목이 마른 사람들이니 아낌없는 칭찬과 비판을 쏟아붓는다. 그러다 보니 위처럼 징그러운 파일이 완성된다.


지금까지 파이프라인은커녕 내 손가락 없이는 모든 일이 마비되는 굉장히 비생산적인 시스템을 살펴보았다. 노트북 앞에서 종종거리고 휴대폰을 수시로 확인해야 하는 일이 때로는 버겁고, 손 안 대고 코푸는 방법을 연구해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글쓰기 노가다'가 나에게 묘한 기쁨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방송일을 할 때와는 또 다른 쾌감이다. 글쓰기는 협업하지 않는다. 첫 문장도 내가 쓰고 마지막 문장도 내가 쓴다. 그에 따른 책임과 과도 모두 내 몫이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 콘텐츠가 사랑받기도, 외면당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내 어깨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나를 춤추게 한다. 귀차니즘에 땅이 꺼지도록 누워있다가도 자판 앞에만 앉으면 머릿속 구름이 커튼처럼 걷힌다. 나라는 사람을 글쓰기로 확인하는 과정은 누가 뭐라 해도 기쁨이다.


글로 맺는 관계도 즐겁다. 글쓰기 코칭을 하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난다. 20대부터 60대가 한 공간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같은 주제로 고민한다. 한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것처럼 다정하다. 그들의 글에는 각자의 체취가 묻어있다. 수줍음이 많은 이, 유머감각이 넘치는 이, 서러움을 품은 이. 글 속에 그들의 캐릭터가 지문처럼 새겨져 있다. '아, 이런 고민을 하는 분이 많으시구나' 나는 오늘도 몰랐던 사실을 하나 더 배운다. 랜선 너머로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주고받으며 오프라인에서 만나지 못하는 실을 아쉬워한다.



코로나가 끝나면, 애들 방학이 끝나면,
날씨가 좀 풀리면, 올해 안에는 꼭....

기약 없는 약속이지만 서로에게 진심이 닿기를 바란다. 녹화 강의로 더 많은 글벗을 닿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이처럼 양방향으로 함께 하는 실감을 느끼기는 힘들지 않을까.


한땀한땀 뜨개질한 목도리가 소중한 이유는 유일무이한 시간이 담겨있기때문이다. 그 시간과 경험은 딱 한 번뿐, 복제하거나 되돌리지 못한다. 인생의 기쁨은 성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몰입하는 순간에서 찾아온다고 믿는다.


생산성 없이 미련하게 일하는 글쓰기 노동자의 변을 들어보았다. 투자를 잘해서, 월세를 줘서 수많은 파이프라인을 구축해서 고 돈 버는 것은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현명한 처세다. 나에게도 기회가 있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 없다. 다만 그러한 돈벌이가 내 몸을 써서 버는 것보다 더욱 가치 있으 지향해야한다고 숭앙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수많은 사람이 오늘도 시간을 팔아 돈을 번다. 돈으로 시간을 사는 것도, 시간으로 돈을 사는 것도 모두 가치로운 일이다. 그것을 저울질하는 자만이 어리석을뿐이다.


문득 '생산성을 높이는 일은 로봇이 할 일이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라는 혹자의 말이 떠오른다. 누구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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