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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Mar 29. 2023

아무리 바빠도 매일 산책하기

쓰는 사람은 걸어야 한다

보행은 가없이 넓은 도서관이다. 매번 길 위에 놓인 평범한 사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서관, 스쳐 지나가는 장소들의 기억을 매개하는 도서관인 동시에 표지판, 폐허, 기념물 등이 베풀어주는 집단적 기억을 간직하는 도서관이다. 이렇게 볼 때 걷는 것은 여러 가지 풍경들과 말들 속을 통과하는 것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 예찬>, 91



창밖 하늘빛이 칙칙하고 구름이 무겁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거 같은 날씨다. ‘나갈까, 말까’를 5분 정도 고민하다가 결국 패딩 점퍼를 걸쳤다. 어디로 돌아볼까 하다가 매일 가는 오산천이 아닌 아파트 뒷산 코스를 택했다. 가파른 등산로가 아닌 산의 가장자리를 살짝 끼고도는 완만한 길이라 단화로도 가뿐하다. 신도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 이 마을 고유의 풍경을 간직한 좁은 골목을 처음 발견했을 때 나만 아는 아지트가 생긴 것처럼 두근두근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을 만큼 큰 소리로 짖는 진돗개를 만나기도 했다. 아무리 바빠도 매일 산책하기, 오늘도 성공.     


방송 일을 하던 시절, 그중에서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아침 방송을 제작하던 시기에 가장 먼저 포기한 것은 정상적인 식사와 식후 산책이었다. 정상적인 식사란 균형 잡힌 영양소가 갖추어진 음식을 식탁 앞에 앉아서 천천히 먹는 것을 뜻한다. 한시바삐 아이템을 잡고 섭외를 해야 하는데 이동 시간을 들여 식당에 가는 것은 사치였다. 주로 책상 앞 노트북을 노려보며 김밥이나 햄버거 따위를 우걱우걱 씹어먹었다. 오직 생존 연장을 위해 연료를 넣는 의미였기에.     


마감으로 밤을 새울 때는 조미료가 듬뿍 들어간 중국 음식을 자주 배달해 먹었는데 새빨간 짬뽕 국물을 들이켜고 나면 부대낌과 함께 졸음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선선한 밤공기라도 마시며 산책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시간 없다며 배달 음식을 먹고 산책은 어불성설 아닌가. 벤티 사이즈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방송 날을 며칠 앞두고 갑작스레 아이템이 엎어진 동료 작가 B의 처절한 모습이 떠오른다.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하니 신용카드를 내밀며 내게 말했다. “나 김밥 한 줄만 사다줄래”.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를 고정한 채.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녀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똑같은 주문을 했다. 2주 동안 책상 앞에서 꼼짝없이 김밥을 먹는 그녀에게 나는 웃으며 “올드보이냐?” 놀렸지만 다음은 내 차례가 아닐까, 속으로는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말할 것도 없이 몸 상태는 나빠졌고 정신은 피폐해졌다. 노동의 굴레 속에 갇혀 두 발로 걷는 방법을 잊어가던 당시의 우리. 가장 많이 내뱉었던 말은 ‘다시 태어나야 해.’, ‘이번 생은 틀린 듯, 너라도 꼭 살아남아.’ 같은 자조적인 체념이었다.     


긴급한 일과 중요한 일 중 긴급한 일만 해치우며 살면 결국 중요한 일은 우선순위에서 밀려 영원히 못 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내가 생각하는, 긴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은 바로 독서와 운동이다. 당장 안 해도 눈에 보이는 손해가 없다. 오늘 책 안 읽었다고 방송이 펑크나거나 직장에서 잘리지 않는다. 일주일 동안 운동 안 했다고 죽을병에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일주일은 한 달, 한 달은 일 년, 평생이 되어 급한 불만 끄는 소방수가 된다. 후회할 때쯤이면 되돌리기 늦었겠지.     


두 발을 교차하며 땅을 밀어낸다. 눈앞의 풍경이 한 걸음씩 뒤로 밀려난다. 반면 내 몸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내면으로만 매몰되었던 시선을 세계로 확장한다. 한 걸음 뒤의 나는 한 걸음 앞의 나로 대체된다. 그렇게 수백 번, 수천 겹씩 나라는 사람은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가벼워지고 나에게는 긴급한 일 말고도 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매일 같은 길을 산책해도 지루하지 않다. 서점 매대에 들어온 신간 제목을 둘러보듯 새로운 자극과 정보가 나를 설레게 한다. 아파트 밖으로 나왔을 때 느껴지는 온도와 공기의 촉촉한 정도, 선명해진 나뭇잎, 어제보다 벌어진 장미 꽃망울, 한 층 더 올라간 주택 공사 현장, 악을 쓰며 놀이터를 뛰어다니는 조무래기들과 파라솔 벤치에 옹기종기 둘러앉은 젊은 엄마들. 하루도 같은 풍경이 없다.      


그 풍경은 글쓰기의 재료가 되기도 하고 미처 부풀지 못한 생각을 발효시키기도 한다. 글은 엉덩이로 쓰는 게 맞지만 진물 터질 때까지 앉아만 있으면 안 된다. 글을 쓰다 보면 꽉 막혀서 오도 가도 못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땐 운동화를 신고 나가자. 기분은 언제나 중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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