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밥 Jan 15. 2024

눈을 치우는 마음

생긴 대로 사는 마음


눈이 자주 오는 겨울이다.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거실 소파에 앉아 바라보면 마음도 순백의 색이 된다. 커피 한 모금을 머금으며 백설기떡처럼 뚝뚝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본다. 여유도 잠깐, 눈이 그치자마자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쿵쾅쿵쾅 발걸음을 옮긴다. 옥상에 올라간다. 눈 치우러.


작년 4월에 이사한 우리 집은 테라스 아파트다. 꼭대기인 4층에 사는 나는 옥상 전체를 점유한, 도시인으로 흔치 않은 행운을 얻었다. 가을에도 매일같이 청소하러 옥상에 올라갔다. 집 근처에 야트막한 산이 있어 아침마다 새소리가 난다며 좋아했었다.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듯 새는 옥상에 새똥과 새털을 갈겼다. 산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온 낙엽이 옥상에 나뒹굴었다. 며칠만 방치해도 수구 근처에 수북했는데, 한 번은 비 오는 날 올라갔더니 발목까지 물이 차서 식겁하기도 했다.


겨울이 되니 눈을 치우는 게 일이다. 지나온 겨울들을 생각해 보면 이렇게 까지 눈이 자주 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올겨울은 남다르다. 한 달에 한두 번이나 올까 했던 눈이 경기 남부 지역에서는 매주 내리고 있다.


옥상 문을 열면 아무도 밟지 않은 '내 소유' 눈밭이 펼쳐진다. 고무 슬리퍼를 신은 발로 조심스레 발자국을 찍는다. 신난다고 서두르면 우레탄 코팅으로 된 미끌거리는 바닥에 넘어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기 놀이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치울 채비를 한다. 눈이 얼어붙기라도 하면 처치곤란이 될 테니까.


실리콘이 붙은 T자형 밀대로 옥상 입구부터 눈을 치우며 길을 내기 시작했다. 아직 얼어붙지 않은 눈은 먼지처럼 흩날리다가 다시 내려앉아 눈꽃빙수처럼 수북하게 쌓였다. 옥상 지붕 끝에는 종유석 같은 고드름이 일렬로 매달려있다. 고드름 뿌리 쪽을 꽃삽으로 탁탁탁 두드리자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유리공예품처럼 청량한 소리를 냈다. 파편이 튀었다. 나는 좀 더 폭력적으로 삽을 휘둘렀다. 바닥으로 떨어져 깨지는 고드름을 보면서 마음 한 구석에 붙어있던 혹이 떨어져 나간 듯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응달 쪽은 벌써 얼어붙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하면서 밀대를 고쳐 잡는다. 바닥에 얼어붙은 얼음 장판 끝단에 실리콘 솔기를 정성스레 밀어 넣고 살살살 들어 올린다. 으드득 소리가 나더니 방사형으로 금이 가면서 얼음 바닥이 깨진다. 힘을 주느라 손아귀가 아프고 목덜미에서는 땀이 나려고 한다. 코끝이 시리다.


30분 넘게 눈을 치우고 뒤를 돌아보니 홍해가 갈라지듯 내가 지나간 길 양쪽으로 눈이 쌓였다. '가만, 다른 집들은 눈 안 치우나.' 나는 목을 길게 빼 옆집 옥상을 염탐했다. 하얀 목화솜 같은 눈 이불이 발자국 한 점 없이 고르게 펼쳐져 있었다. '나중에 얼면 고생할 텐데'. 괜히 오지랖을 부려본다. 굽혔던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켠다. 목욕탕에서 방금 나온 듯 개운했다.


몇 시간 뒤. 내 방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창밖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하고 내다보니 건물마다 눈 녹은 물이 줄줄 떨어진다. 해가 난 것이다. 놀라서 옥상에 올라가 봤다. 공을 들여 제거했던 얼어붙은 눈이며 바닥에 떨어진 고드름 조각들이 사라졌다. 옆집 옥상을 바라보니 목화솜이불은 누가 개었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반나절 사이 달라진 광경에 허탈했다. 가만히 기다리면 해결될 일을 굳이 사서 고생한 것이다. 도리어 길을 낸다고 한쪽으로 쌓아둔 눈더미는 그대로 얼어붙어 해가 나도 녹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하는 걱정이나 불안 따위가 늘 이런 식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될 일을 참지 못하고 앞서서 처리하느라 부러 애를 먹었다. 마음에 붙은 작은 근심 조각을 조금이라도 빨리 떼어내려는 조바심이 바람 앞 촛불처럼 일렁거렸다.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 불확실성을 힘들어하는 사람. 몸이 힘든 것보다 마음이 힘든 것을 더 버티지 못하는 사람.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 여유가 부족한 사람. 결국엔 그릇이 좁은 사람. 나는 새하얀 눈을 가득 담고도 넉넉한, 그릇이 넓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한심한 기분이 들었지만 잠깐이었다. 그 모습도 나 이기 때문에 인정하고 싶었다. 누구나 타고난 기질이 있으니까. 그릇마다 쓰임이 다르니까. 넓은 대접에는 따끈한 설렁탕을 담을 수 있지만 고기를 찍어먹을 간장 종지도 필요한 법이니까.


나는 걱정도 쌓아두지 않지만 일도 쌓아두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재빨리 해치우고 편안한 마음으로 쉬거나 노는 것을 좋아한다. 바빠도 24시간 안에는 이메일 답장을 하려고 한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을 빨리 처리했을 뿐인데 신뢰를 얻었다.


생각해 보니 눈을 치우는 일이 마냥 고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겨울에는 춥다고 밖에 잘 나가지 않는 편인데, 핑계로 옥상에 올라갔다. 아무도 밟지 않는 새하얀 눈을 밟는 행운을 누렸고, 자애로운 아침볕을 맞았다. 일부러 헬스장을 가지 않았는데 땀이 올라올 정도로 운동도 했다. 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눈얼음을 떼어낼 때는 솔직히 쾌감도 느꼈다. 이런 걸 '몰입'이라고 불러도 될까.


그래, 사람은 생긴 대로 사는 거다. 또 눈이 내리면 나는 참지 못하고 옥상에 올라가겠지. 밀대를 잡고 사서 고생하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어차피 녹을 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용한 일을 한다. 혹시라도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면 '간장 종지로구나'하고 넘어가주시길.





새해에는 흘러가는 시간을 잠깐 멈추어 세워 나의 '일상을 살피는 마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의미 없이 지나친 순간도 그러모으면 하루를 사는 비타민 한 줌이 될 거라 믿어요. 아무리 바빠도 매일 글 쓰는 작가 다섯이 꾸려가는 공동매거진 <일상을 살피는 마음>을 구독하고 당신의 일상에도 영양 듬뿍 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옷을 사지 않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