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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채원 Jan 16. 2024

일기를 쓰는 마음

일기를 쓰고 싶은 날이 있다.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를 감정을 붙들고 있는 날이나, 답도 없는 고민에 파묻혀 숨이 막힐 것 같은 날. 누구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는 마음을 독백처럼 일기에 쏟아내고 싶은 날이 있다. 가끔은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어 꾸준히 일기를 쓰겠노라 다짐하는 날도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 다짐을 지킨 적은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항상 일기장을 고르는 만큼이나 일기장을 펼치는 일에 신중했다. 심혈을 기울여 고른 일기장은 번번이 다섯 페이지도 채우지 못하고 버려지곤 했다. 내 인생 마지막 일기장을 버리던 날, 다시는 일기장을 사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새해를 맞아 글쓰기 모임에 들어갔다. 처음 단체채팅방에 모여 인사를 나눌 때, 서로에게 책도 한 권씩 추천하기로 했다. 놀랍게도 스무 명이 모인 방에서 무려 세 명이나 같은 책을 추천했다. 바로 김신지 작가님의 <기록하기로 했습니다>였다. 김신지 작가님이라면 나도 안다. <평일도 인생이니까>를 쓰신 작가님이다. 몇 년 전에 그 책을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아, 에세이는 이렇게 쓰는 거구나. 부럽다, 이 재능. 그래서 이 책을 쓴 사람이 누구라고?' 하며 작가 이름을 다시 확인했던 기억이 있다.


글을 쓰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입을 모아 추천한 책은 도대체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서 포털 사이트에 목차를 검색했다. 첫 번째 챕터의 제목 '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였다. 왼손으론 턱을 받치고 오른손으론 마우스 휠을 내리며 '김신지 작가님은 일기를 쓰시는구나. 참 작가다운 습관이네.'하는 생각을 하다 또다시 몹쓸 '일기 쓰고 싶어병'(이하 일기병)이 고개를 들었다. 일기병에 걸리면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까먹는다. 일기병에 걸린 나는 김신지 작가님과 나의 유일한 차이점이 '일기 쓰는 습관'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직 책을 못 쓴 건 다 일기를 안 쓰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기만 쓴다면 나도 <평일도 인생이니까> 같은 책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일기와 에세이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는 점에서 같다. 차이가 있다면 일기는 내가 쓰고 내가 읽는 글이지만, 에세이는 내가 쓰고 다른 사람이 읽는 글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일기가 일요일 오전의 내 모습을 담는 거라면 에세이는 데이트하는 날의 내 모습을 담는 거다. 일요일 오전은 느지막이 일어나 대충 눈곱만 떼고 부스스한 머리로 침대에서 조금 뭉그적거려도 좋은 시간이다. 만약 그날 데이트 약속이 있다면 부지런을 떨며 씻고 공들여 화장해야겠지만. 일기는 꾸밈없는 민낯의 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고, 에세이는 풀메이크업도 모자라 예뻐 보이는 필터지 적용해 셀카를 찍는 것이다.  


앨범을 뒤적 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호빵만 한 내 민낯을 발견하면 보는 사람이 없어도 민망해서 삭제 버튼을 누르고 싶어진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꼴로 사진을 남긴 건지, 그 와중에 각도는 왜 45도고 입꼬리는 왜 올린 건지 과거의 나를 만나 따져 묻고 싶다. 내가 쓴 일기를 다시 읽는 것도 그런 기분이다. 실제로 며칠 전에도 과거의 내가 공책 한 귀퉁이에 끄적인 메모를 발견하곤 얼굴이 달아올라서 공책을 찢을 뻔했다. 보름달이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넸댔나 뭐랬나, 아무튼 대충 봐도 술 한잔 마시고 달을 보다 감상에 젖어 쓴 글 같았는데 몹쓸 표현력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실제론 공책을 찢지도 못하고 다시 책꽂이에 꽂아놨는데 차마 그 페이지를 내 손으로 다시 만지고 싶지도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내가 일기를 꾸준히 쓰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 진솔한 마음을 편하게 써 내려가자니 부끄러움은 언젠가 그 글을 읽을 나의 몫이고, 그렇다고 조금 꾸며서 쓰자니 약속도 없는 날 굳이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한 채로 소파에 누워 TV를 보는 것처럼 쓸데없이 번거롭다. 민낯 셀카 같은 일기를 견딜 수 없어 생각해 낸 대안도 있긴 하다. 뒷모습만 찍거나 멀리서 찍어 실루엣만 겨우 나오게 하는 방법이다. 최대한 감정을 덜어내고 건조한 문체로 사실에 기반해 일기를 써 봤다. 다시 읽어도 수치스럽지 않게. 그렇게 쓴 일기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다. 쓸 때도 읽을 때도 아무 의미가 없다.


사람을 만나다 보면 말없이 있어도 편안한 사람이 있고 1초의 공백도 못 견디게 불편한 사람이 있다. 편한 사람을 만날 때는 몸도 마음도 덜 꾸미게 되는데 불편한 사람을 만날 때는 작은 흠이라도 잡힐까 봐 몸가짐 하나하나 신경이 쓰인다. 꾸밈없는 내 마음을 나에게 보여주는 게 불편한 걸 보면 나는 아직 나 자신과 덜 친한 게 아닌가 싶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가정사며 지나간 연애 얘기까지 다 털어놓으면 오히려 어색해지듯 아직 덜 친한 나 자신에게 너무 진솔한 일기를 써서 보여줬더니 더 데면데면해진 것 같다. 어찌 보면 나와 나 사이의 관계도 인간관계가 아닐까. 막무가내로 들이대지 말고 천천히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야겠다. 언젠가는 엽기 사진을 찍어 보내도 호탕하게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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