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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Apr 18. 2019

영화 <죠스>에는 상어가 안 나온다?

막을수록 더 새어 나오는 너란 창의성


작열하는 태양, 하얗게 넘실대는 파도.
한가로이 모래사장에 누워 태닝을 즐기는 어른들.
바다에는 튜브에 몸을 실은 어린아이들이 동동 떠다닌다.
물속 아이의 작은 발은 물장구를 치느라 바쁘다.
아이들의 발 사이를 훑고 지나가는 어떤 불길한 시선.
공포스러운 음악은 점점 고조되고 비명소리와 함께 바닷물이 핏빛으로 물든다.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스티븐 스필버그 <죠스>(1975)의 명장면. 분명 상어가 등장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어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는지 직감할 수 있다. 마치 바닷속을 유영하는 상어를 눈 앞에서 본 느낌이다. 카메라는 상어를 찍는 대신 상어의 눈이 되기로 했다. 상어 시선으로 찍은 ‘시점 쇼트’는 지금은 많이 활용되는 기법이지만 <죠스>가 나온 1970년대에는 파격적인 시도였다고 한다. 당시 신인감독에 불과했다는 스필버그는 어떻게 이런 연출을 생각했을까?


어제 다녀온 강연,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창의성’에서 이러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졌다. 사실 나는 이동진 님의 오랜 팬이다. 그가 진행하는 북 팟캐스트 <빨간 책방> (얼마 전 시대의 흐름에 맞춰 유튜브로 변신했다)을 6년 넘게 구독하고 있다. 그는 내가 아는 한 ‘말을 가장 맛있게 사람’이다. 영화만 2만 시간 이상 보고, 그 이상의 시간을 독서로 소비했다는 인간 지식 창고. 언변마저 뛰어나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면, 한 치의 논리적 흐트러짐이 없을뿐더러 과하지 않은 유머에 겸손함까지 갖췄다! 한마디로 ‘뇌섹남’을 연상시킨다고 할까. 아무튼 나의 덕질은 팟캐스트와 동명인 합정에 있는 북카페 <빨간 책방>이 폐점을 하면서 잠시 멈추는 듯했다. 그런데 반갑게도 우리 집에서 머지않은 곳에서 그의 강연이 있다니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뇌섹남 같으니!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를 시작으로 영화 속에 담긴 '창의성'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됐다.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멜로 대명사인 이 영화 속 배경인 ‘초원 사진관’은 군산에서 실제 가본 적도 있다. 동진 님은 한석규가 본인의 영정사진을 찍는 영화 속 한 장면을 먼저 보여줬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진관 주인인 그는 담담하게 카메라로 셀프 영정을 찍는다.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그 사진은 그다음 장면에서 까만 리본이 둘러진 영정사진으로 자연스럽게 디졸브 된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 아닌가? 이 효과가 왜 창의적이냐! 고 묻는다면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영화산업이 급격하게 부흥한 건 1990년대 중후반. (이 시기는 대중가요 전성기이기도 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이 시기에 우리가 대가라고 하는 영화감독과 송강호, 한석규, 최민식과 같은 걸출한 배우들이 등장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전인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영화의 분위기는 확 달랐다고 한다. 동진님의 말을 요약하자면 굉장히 ‘촌스럽고 신파적’이었다고. 이렇게 시한부 주인공이 자신의 영정을 담담하게 찍는 장면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거다.

동진님은 90년대 초반 스타일로 영상을 재구성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주인공은 아픈 몸을 질질 끌며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는다.

문틈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그를 사랑하는 여인은 소리 없이 눈물을 삼킨다.

이 모습을 지나가다 본 할머니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넨다.     


이게 뭐~야! 나를 포함한 청중은 오그라드는 장면을 상상하며 폭소했다. 그런 시대에 이런 쿨한 연출을 할 수 있었던 허진호 감독의 창의성은 어디서 왔을까? 그 영감의 시작은 미용실(?)에서 우연히 꺼내 든 잡지였다고. 젊은 나이에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故 김광석의 영정사진은 급하게 구한 인터뷰용 사진이라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고 한다. 감독은 ‘본인의 영정사진을 찍는 사진사’라는 아이러니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상업성을 위해서 ‘사랑 이야기’를 추가했다. 사랑의 대상은 자연스럽게 사진관을 드나들 만한 여자여야 했다. 주차단속을 하는 사람(심은하 역)이 좋겠다. 당시엔 필름 카메라로 찍어 사진을 인화를 해야 했기 때문에 주차 단속요원이 사진관을 자주 들렀다고 한다.


당시 허진호 감독은 데뷔작에 승부수를 띄우고자 많은 고민을 하고, 다양한 곳에서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얻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잡지 속 영정사진 한 장이 감독의 창의성을 발동시켰다. 동진 님은 ‘창의성’은 가만히 책상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두 발 벗고 찾아 나서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며 깔끔하게 정리했다.

     

다시 죠스로 돌아가자

<죠스>의 이야기는 어제 내가 강연을 가기 전에 참여했던 독서모임 ‘씽큐베이션’에서 나누었던 이야기의 연장선이라 놀라웠다. 토론 주제 중 하나는 '창의력이 솟는 순간'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방송을 제작할 때 ‘분량 제한’이라는 제약 때문에 편집을 통해 내용을 덜어내는 과정에서 창의성을 발휘하게 된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우린 이러한 ‘제약’의  반전 매력인 유용한 측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런데 스티븐 스필버그도 이 제약을 역으로 잘 활용해 <죠스>라는 대작을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엔 CG가 없던 시절이라 상어 모형을 만들어 영화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고무상어가 물에 들어가면 자꾸 고장이 나는 바람에 영화 제작에 애를 먹었다. 그래서 상어가 없이도 마치 상어가 나타난 것 같은 효과를 어떻게 하면 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이 ‘시점 쇼트’를 활용하게 된 것이란다. 제약이 창의성을 끄집어낸 것이다. 물론 존 윌리엄스의 훌륭한 음악이 화룡점정을 했지만 말이다.

동진 님은 또 다른 예시를 들었다. 무엇이나 할 수 있는 루즈한 환경보다는 부장이 쪼고 마감이 임박한 상황과 같이, 어떠한 압박과 제약들이 오히려 사람의 창의력을 끌어내기도 한다는 역설이다. 진짜 그런 듯하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서있는 것보다는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얽힌 옛길을 걷는 편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기 쉬울 것이다. ‘핸디캡’은 더 이상 약점이 아니다. 오히려 창의력에 불을 붙이는 방아쇠일지도.


오늘은 어떤 제약이 나를 옭아매는가.

그것이 어쩌면 나의 잠재력을 끌어낼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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