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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유이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서평

by 글밥 김선영

이십 대 때,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를 처음 읽었을 때는 애끓는 사랑, 즉 '슬픔'에 공명했다. 사십 대가 되어 다시 읽었을 때는 슬픔보다 '젊음'에 눈길이 갔다. 젊음, 청춘. 그 짧고도 혼란하며 그래서 찬란한 시절. 김연수 작가는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라는 명문을 남기기도 했다. 그 문장(괴테가 이미 말했을지도 모를!)이 내게는 청춘이 지나서야 만 깨달을 수 있는 중년의 비밀처럼 느껴진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삶의 곡절을 더할 나위 없이 흥미진진하게 보여주었다. 세상에 나와있는 모든 서사가 과연 파우스트 박사의 생을 비켜갈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인간의 복잡 다양한 면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은 사람이라면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라는 문구에 어느 정도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감과 호기심을 동시에 일으키는 제목의 책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를 앞에 두고 펼쳐진 단상이었다. 이동진, 신형철, 은유의 추천을 받는 일본 문단의 샛별이 쓴 책이라니 망설임 없이 책을 열었다.



명언은 있지만 출처는 모른다


Love d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 Gothe
-> 홍차 티백의 꼬리표에 쓰인 명언 문구


소설의 줄거리는 지극히 간단하다. 괴테 연구가 도이치는 가족과 식사를 하다가 홍차 티백에 달린 꼬리표에 적힌 명언을 발견한다. 괴테를 통달했다고 여기는 그가 처음 보는 문장이었다. 정말로 괴테의 것인지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출처를 알아낸다.


며칠 안 되는 에피소드로 책 한 권이 나온 것도 놀라운데 그 안에 등장하는 지식과 교양의 양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 책은 아는 만큼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서사만 즐기는 게 아니라 지적 유희를 채울 수 있는 소설이다. 이동진 작가가 기차 안에서 후루룩 읽었다고, '오? 술술 읽히나 보다!'하고 덤볐다가는 작은 코가 더 작아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나 역시 얇은 두께에 가볍게 접근했는데, 틈틈이 읽긴 했지만 일주일이 내내 걸렸다. 그런데 이 느린 진도가 이 책의 묘미이기도 하다. 후루룩 읽고 덮는 책은 그만의 매력이 있지만, 좋은 책임을 알았는데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는, 아껴 읽는 책은 또 그만의 맛이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거라 믿는다.


참고로 아래는 프롤로그를 포함한 50페이지 안에 등장하는 각종 인문학적 개념들이다. 개념 하나하나를 깊이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언급만 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몰라도 읽는 데 큰 지장은 없으나 아예 모르면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다. 또 그 개념들이 교묘하게 서사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저자 스즈키 유이는 1년에 책을 1,000권 읽는 사람이라 '이 정도는 상식이지?'하고 넘기는 모양이니 너무 좌절하지는 말기로.

파우스트, 실낙원, 성경, 플라톤, 서동시집, T.S 엘리엇, 나쓰메 소세키, 베르길리우스, 뉘른베르크 연대기, 마루야 시이이치, 데이비드 로지, 색채론, 포스트모더니즘, 헤겔의 휴일,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브렉시트, 글렌 굴드, 골드베르크 변주곡, 오즈의 마법사, 셰익스피어, 제임스 조이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50페이지 안에 등장하는 각종 인문학적 지식



현대판 <파우스트>라 불러도 될까?


세상은 언제나 똑같군. 여러 가지 상태가 항상 반복되지. 어느 민족이건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살고, 사랑하고, 느끼고 있어.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고, 우리는 기껏해야 그것을 다른 형식이나 표현으로 되풀이할 뿐이야.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p.116

나는 스즈키 유이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가 괴테의 <파우스트>와 꽤 닮은 구석이 있다고 해석했다. 물론 방대한 스케일은 비교할 수 없지만, 메시지적으로 말이다. 파우스트 박사는 세상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는 삶의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꼬임에 넘어가 시대를 초월 종횡무진하며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욕망을 채우며 모험을 했고, 결국엔 파멸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그는 '헤매는 인간'이라는 사유로 구원을 얻게 된다.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방황 자체가 인간 실존이기 때문이다. 도이치가 명언의 진위를 찾기 위해 헤매는 그 모습이 나는 파우스트 박사의 방황과 닮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그 방황을 감싸는 위안은 두 작품 모두 동일하게도 '사랑'이었다. 파우스트에게는 그 사랑이 구원이라는 형태였다면, 도이치에게는 곁에서 그가 평소 지적으로 무시했던 아내였다. 놀랍게도 그 출처는 아내가 평소 즐겨보던 식물 유튜버 베버를 통해 알게 되었고, 또 그를 통해 아내가 자신이 쓴 책을 바탕으로 식물 정원을 만들었다는 사실(도이치가 몰랐던 사랑)을 깨닫게 된다.


베버는 아키코가 좋아하는 유튜버라는 것을.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의 명언 찾기는 결코 의미 없는 짓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반드시 이어져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무언가로부터 생겨났고, 우리는 아직 살아있으니까. (p.212)

“괴테의 ‘친화력’에 나오는 정원을 재현한 작품이 특히 멋졌어요.” “허, 아내가 그런 걸 만들었나요?” 도이치가 물었다. “네, 모르셨어요?” 베버 씨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이 선물한 책이라서 제일 먼저 도전했대요. 보여달라고 하세요.” (p.219)


도이치는 세계를 '잼적 세계'와 '샐러드적 세계'로 구분한다. 잼은 모든 재료가 섞여서 그저 '잼'으로 퉁친다. 그것을 구성하는 세부적인 요소들을 알기 힘들고 개성은 몰살된다. 반면 샐러드는 한 데 섞여있지만 재료 하나하나가 살아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토마토나 양상추라고 부를 수도 없다. 샐러드는 샐러드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뭘까, 샐러드를 샐러드이게 만드는 소스 정도 되려나.



언어가 지니는 한계,

그리고 권위에 대한 비판

이 책은 기본적으로 '언어'에 관한 책이다. 결국 명언의 출처가 괴테의 것인지 아닌지 불분명하게 끝이 나지만, 소설을 다 읽을 때쯤 그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남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말은 이미 누군가 했던 말이고, 결국 그것이 맥락에 따라 재사용되는 것뿐이니까. 소설에서는 추적 끝에 괴테가 썼다는 연애편지에서 그 원형을 찾았는데 이미 홍차 꼬리표까지 전수되는 과정에 많은 변형이 있었다. 책에서는 이 명언의 변형 과정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 요약형 명언(원래 말의 복잡한 의미가 단순하게 변하고, 걸핏하면 뜻이 거꾸로 뒤집힌다), 전승형 명언(누가 시초인지 불분명하게 여러 명인), 위작형 명언(주인이 잘못 알려진).


그렇다면, 명언의 원작자가 이러한 변형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 궁금해졌다. 만약 수년,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 내가 쓴 글이 의도와는 다르게 사람들이 해석하고 사용하고 있다면 억울하고 화가 날까? 나는 일개 작가로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말은, 글은, 기록은 그것이 발화되는 순간 그 사람의 것이 아니게 된다. 독자와 청자는 자신의 경험에 따라 그것을 재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경험이란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아서 오해를 좁힐 수 없다. 이것이 언어의 한계다.


도이치의 온갖 생각, 힘, 행위의 소산일 말, 말, 말… 그러나 그는 지금 그 안에서 새로운 생각이나 힘, 행위의 태동을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일단 언어화된 생각이나 힘이나 행위는 핀으로 꽂아 표본 상자에 가지런히 넣어둔 나비처럼 두 번 다시 날갯짓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p.38


그런데 사람들은 맥락과 메시지보다 '메신저'에 매몰된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괴테가 했는지, 글밥이 했는지에 따라 명언이 되기도 소멸되기도 한다. 가령 괴테가 한 말이면 믿어 의심치 않고 그것을 진리인 양 받든다. 그래서 어떤 말이든 '괴테가 말하길, '이라고 덧붙이면 모두 수긍을 한다는 소설 속 풍자가 나오게 된 배경이다. 저자는 그리고 이러한 인용 덩어리로 만들어진 학계를 비판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전 학자들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시가 생활에서 나오지 않고 책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듯해서요. 그들은 입버릇처럼 ‘이건 여기서 따왔다, 그건 거기서 따왔다!’하고 말합니다. 일테면 셰익스피어의 글에서 고대 시인도 썼던 시구를 발견하면 셰익스피어는 고대 시인을 인용했다고 말하는 겁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닙니까! 실생활에서 따오든 책에서 따오든 그런 건 아무 상관없어. 제대로 사용했는지 아닌지, 그것만이 중요하지! p.117


그래서 의도적으로 논문의 출처를 날조하고 스스로 명예를 실추 시킨 시카리 노리후미 교수의 선택은 어리석기보다는, <이방인> 뫼르소의 저항처럼도 느껴졌다.


저는 학문을 파괴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고발하고 싶은 것도 아니며, 오히려 용인하고 싶습니다. 저는 학문이란 실패와 오류의 연속이라고 봅니다. 실패와 오류야말로 다양성의 근간이지요. 신화와 언어의 다양성이 곧 실패와 오류입니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는 실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크게 실패해 드렸습니다. 실패하는 동안에는 분명 동료들에게 미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해해 줄 것입니다. 저는 제가 <신화력>에서 쓴 힘을 실행했을 뿐입니다. p. 232


스즈키 유이의 <괴테는 말했다>는 결국, 명언의 진위를 찾는 과정에 그동안 우리가 중요하다고 믿어온 것이 실제로 중요한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것을 좇다가 정작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가령, 사랑이라든지.




내가 아직 자네의 선생인 셈 치고 한마디 하자면, ‘네 노력은 사랑 속에서 있어야 하고, 네 생활은 실천 속에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싶네. 이것만 잊지 않으면 지금으로선 문제가 없어. 이건 괴테의 말이지?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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