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을까?
6월 독서모임 주제로 선정한 책은 황석영 소설 <철도원 삼대>다. 총 분량 612페이지(작가의 말 제외)로 두툼한 장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은 한반도 100년의 역사를 한 권에 담아냈다.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했을 당시에는 세계 3대 문학상 중의 하나인 '부커상' 후보작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수상은 불발되었다. 나는 81세 고령의 나이로 필생의 역작을 집필하신 황석영 작가님께 좋은 소식이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했는데 많이 아쉬웠다(책이 더욱 알려지는 계기가 될 터이니)
책에는 정말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물 관계도를 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초반부에는 상황 파악하랴, 인물 관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다. 하지만 이런 과정 자체가 나는 장편이 주는 또 하나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알마인드 툴로 아래와 같이 기본 인물 관계도를 만들어 보았다.
철도원 삼대는 이백만-이일철-이지산이다. 그리고 이지산의 아들 이진오의 회상 방식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소설은 주인공 이진오가 독특한 자세로 용변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첫 문장부터 용변 누는 자세 묘사가 나와서 당황스러웠는데 이유가 있었다. 그는 지상 45미터 위 열병합발전소 지름 6미터짜리 굴뚝 위에 올라가 있다. 둘레 공간 폭은 1미터로 열댓 걸음이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의 전부이며 당연히 화장실이 따로 없다. 그곳에서 400일 넘게 등산용 텐트를 치고 숙식 중이다.
황석영 <철도원 삼대> 줄거리 (스포일러 있음)
부당 해고를 당하고 홀로 굴뚝 위에 올라가 일 년 넘게 시위 중인 이진오. 그는 외로운 싸움 중에 투명 페트병을 친구 삼아 고인들의 이름을 써놓고 소통한다. 증조할머니 주안댁, 할머니 신금이, 함께 투쟁하던 노동자 동지 등- 추억 속의 인물을 하나하나 부르면 그들이 나타나고 시간은 과거로 되돌아간다. 이 과정에 이백만-이일철-이지산-이진오로 이어지는 철도원 삼대 가족사가 펼쳐진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일제 식민지에 사는 노동자계급 여러 인물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맏형 이일철(한쇠)은 현실에 순응해 창씨개명을 하고 철도원 기술을 연마하며 기관수로 살아남는다(나중에 반전이!). 동생 이이철(두쇠)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독립을 꿈꾸며 험난한 자갈길을 걷는다. 이일철의 어릴 적 친구였던 최길영은 일제의 앞잡이로 활동하며 사회주의자들을 붙잡고 고문하며 특진으로 승승장구하다가 나중에 칼 맞아 죽게 된다. 410일 만에 노사 타협으로 굴뚝에서 내려온 김진오. 하지만 결국 사측의 눈속임이었음을 깨닫는데...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재미를 더하다
황석영 <철도원 삼대>의 흥미로운 점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에 유령이 등장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물고기가 욕을 하고 키우던 돼지가 말을 한다. 그것을 꿈이나 상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처럼 묘사한다. 나는 이런 뻔뻔한 거짓말을 읽으려고 소설을 읽는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그랬고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이 그랬다. 이를 '환상적 리얼리즘(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았다.
아무튼 아버지는 물텀벙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앉았는데 그 녀석이 입을 우물거리며 이랬다는 것이다. 예미럴, 예미럴, 예미럴. 분명히 그에게 욕을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화들짝 놀라 분김에 그놈의 꼬리를 잡아 땅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 “어서 불 때라, 어서.” (중략) "물텀벙이가 저승사자였던 게야" p.66
고구마를 먹다가 죽은 주안댁은 가족들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경사가 생겼을 때 수시로 나타난다. 마을에 엄청난 홍수가 나 위기에 처했을 때 물속을 헤치며 식량을 구해오는 장면은 전설처럼도 느껴진다.
홀로 굴뚝 위에서 숙식(밥은 동지들이 도르래로 올려준다)을 해결하는 이진오는 적적함에 페트병을 잘라 상추 등 식물을 키운다. 어느 날은 투명 페트병에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붙여준다. 그리고 이들의 이름을 부르면 이들이 나타나 대화를 하거나 과거 여행을 시작한다.
“야, 깍새 오랜만이다. 나는 가끔 니가 보구 싶었다. 너하구 놀러다니던 귀신바우와 샛강에 가보고 싶었지. 양말산 밤섬에두 가보구 싶었다구.” 열두어살 소년이 까치발을 하고 그의 머리맡에 앉았다. p.106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의 관계, 그리고 노동자의 삶
형 이일철은 아버지 이백만의 뒤를 이어 철도원의 길을 걷지만, 동생 이이철은 일제와 자본가의 노예로 살기를 거부하며 사회주의를 통한 독립운동에 심취한다. 그런 그를 가족들이 처음에는 만류한다. 아래는 이백만이 이이철에게 사회주의 운동을 그만두라고 권하는 장면인데, 일견 수긍이 가면서도 이이철이 얼마나 외로운 싸움을 했을지 짐작이 간다. 다행히 나중에는 가족들이 이이철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고, 형 이일철은 동생을 돕기도 한다.
“너희들 사회주의 놀음하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우리나라가 독립해야 된다는 걸 모르는 조선 사람이 어딨냐? 우선 이 세월을 견디구 살아남아야지. 나는 그래두 운이 좋아 직장을 얻어 오늘날까지 먹구살아왔지.”
"아부지가 운이 좋긴 뭐가 좋아요? 아부지한테는 왜놈들이 상전이구 주인이잖아요? 제 말씀은요, 일본 놈이든 조선 놈이든 그냥 목숨만 부지할 정도루 주는 대루 먹구사는 종놈이 아니라, 일한 만큼 대우를 받으며 살자는 거예요. 그런 사회가 오면 나라도 독립이 되겠지요.”
이철의 말에 이백만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니 말이 일리가 있다 치자. … 먼저 지 몸을 일으켜서 생활 기반을 만들어야지.” p.130
이이철은 자신이 노동자 계급임을 각성하고 독립운동과 계급운동은 결국 같은 목적(같이 잘 먹고 잘 살자!)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멈출 수 없다.
한편, 일제 앞잡이 최달영(야마시타)의 승승장구를 보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돼지치기를 하며 최하층민의 삶을 살던 그는 우연한 계기로 일제의 밀정 역할을 시작하였고, 독립운동을 하는 사회주의자를 때려잡으며 특진을 거듭한다. 일제 식민지가 누군가에게는 계급 상승의 기회가 된 것이다. 그 또한 살아남기 위한 방식으로, 땅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 먹어야 할 정도로 궁핍했던 그 시절 생존을 위한 전략이었다.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과연 기아에 허덕이며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꼿꼿하게 살았을까 자문해보기도 했다.
소설을 읽어 갈수록 일말의 죄책감 없이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최달영의 모습은 혐오스러웠고, 그가 키우던 돼지보다 못한 인간의 추악함에 환멸감이 들기도 했다. 소설에 몰입한 사람이라면 그가 죽임을 당했을 때, 사이다 한 컵을 들이켜는 듯 후련했을 것이다.
현실에 순응하며 살다가 이일철이 조금씩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소설의 재미다. 신의주에서 경성까지 사회주의 활동가를 데려오는 임무를 맡게 된 동생 이이철. 경의선 구간 히카리호의 기관수인 형에게 협조를 구하는데 흔쾌히 도와준 것이다.
"당신이 미안할 게 뭐요? 내 아우인데. 녀석이 집안의 골칫거리지만, 어디 가서 무슨 도적질을 하는 것두 아니오.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하자는데 우리만 편히 살 수 있나." p.469 - 이일철이 이이철의 말을 전달하는 아내 신금이에게 하는 말
이일철은 해방이 된 후 급속하게 변한다. 영등포 철도공작창의 노조지부장을 자의로 맡은 것이다.
신금이는 해방되고 나서 남편이 급속하게 변해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온건하고 단정한 모습은 변하지 않았으나 적에 대한 증오와 결의는 단호했다. 그녀는 남편이 차츰 집안일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아우 이철의 죽음이 가슴의 못으로 깊이 박혀 있었던 때문인 듯했다. p.530
나는 이 부분이 조금 의아했다. 동생의 죽음과 조선의 해방이라는 큰 사건이 있긴 했지만 갑자기 계급의식이 생기고 월북을 하는 이일철의 변화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일철은 최달영처럼 개차반 같은 인물은 아니었다. 소설 전반에서 현실적이고 사리 분명한 사람이었다. 마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나오는 장하림(박상원 역)을 떠올리는 캐릭터였다. 만약 이일철이 동생의 활동을 여러 가지 이유로 돕지 못해 형으로서 큰 자책감을 느끼는 장면이나, 조용히 순응하며 사는 자신의 태도에 '현타'를 느끼는 장면이 좀 더 추가된다면 좀 더 설득력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오는 국민학교 시절에 할머니 신금이에게 되물은 적이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그랬다 치고, 왜 우리 식구들은 힘센 쪽에 붙지 못하고 맨날 지는 쪽에만 편들었어요?"
"왜, 약한 쪽 편드는 게 싫으냐?"
"물론이지요. 너무 손해잖아요?" 그러면 할머니는 감실감실 주름살 잡힌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에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 있다. 너무 느려서 답답하긴 했지만." 그리고 신금이는 덧붙였다."오래 살다보면 알 수 있단다. 서로 겉으로 내색을 안 할 뿐이지 속으로 다들 알구 있거든."
황석영 <철도원 삼대> p.564
반드시 읽어야 하는 '작가의 말'
소설 말미에 붙어 있는 작가의 말을 읽고 많이 놀랐다. 실화가 꽤 들어갔다고는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많았고, 집필 계기 또한 신기했기 때문이다.
황석영 작가는 1989년 방북 때 평양에서 만난 어느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에서 이 소설의 구상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영등포에 살았으며 철도공작창에 다니던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아들 데리고 월북했고 아들은 기관수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굴뚝 위에 올라간 이진오는 '차광호'씨가 모델이 되었다. 차광호 씨를 직접 만나 굴뚝 위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인터뷰하고, 증기기관차 기관수 강혜진 노인을 만나 증기기관차의 구조와 운전 실기를 들었다고 한다.
황석영 작가는 '우리 근현대문학의 빠진 부분을 채우고 싶었다'며 '근대 산업노동자들을 반영한 장편소설이 드물다'라고 했다. 이 부분을 읽으며 가슴이 울컥했다. 소설가의 사명이 느껴졌다고 할까. 소설은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역사 기록물'의 역할도 수행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고령에 쉽지 않았을 긴 호흡의 장편 집필이, 그에게는 평생의 과업처럼 느껴진 걸까.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이어지던 철도는 식민지 근대와 제국주의의 상징물이기도 했다. 세계의 근대는 철도 개척의 역사로 시작되었다. 나는 식민지 시기부터 분단된 후기 자본주의 세계화체제의 한반도에서 지난 백여년 동안 살아온 노동자들의 꿈이 어떻게 변형되고 일그러져왔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황석영 <철도원 삼대> 작가의 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