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평맛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밥 Aug 19. 2023

여전히 나는 아버지를 모르지만

웃으면서 읽다가 울면서 덮는 <아버지의 해방일지>


소설을 읽고 눈물을 흘린 게 얼마 만인지. 평소 눈물이 많은 편이지만 책을 읽고 운 것은 참 오랜만인 듯싶다. 심지어 작년에 읽고 두 번째 읽는데 말이다.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그렇다고 마냥 슬픈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시종일관 유쾌한 쪼다. 웃겨서 슬프다고 해야 할까. 말하자면 세련된 슬픔이다.


소설 속 배경이 구례의 산골마을이라 등장인물들은 구성진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마치 판소리를 듣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가 판소리의 창이라면, 딸 고아리의 설명은 해설로 덧붙이는 아니리 같았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지아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그녀가 소설을 쓰면서 얼마나 많이 웃고 눈물을 훔쳤을지 상상해 본다. 탈고를 하며 얼마나 후련했을지도. 비로소 아버지와 화해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특별히 싸운 적이 없었더라도 말이다.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은 빨치산의 딸, '고아리'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다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는다. 소설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3일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장례식장에 찾아온 조문객들은 하루만 와도 되는 장례식장에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아리는 장례를 치르며 아버지에게 신세를 지거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사연을 듣게 된다. 빨치산 아버지뿐만 아니라 남자로서, 친구로서의 아버지를 하나하나 알게 된다. 아버지와 얽힌 다양한 사람과 사연을 곱씹으며 자신이 무지했던, 그래서 무시하던 혹은 미워하던 아버지를 점점 이해하게 된다. 이 소설은 어쩌면 '다 큰 딸의 성장기'라고도 할 수 있다.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 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하자고 졸랐다는 아버지의 젊은 어느 날 밤이 더 이상 웃기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 내 아버지였다. 누구나의 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 (p.249)


지금은 종영한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이 떠올렸다. 노잼을 선사한 죄로 산채로 죽은 사람 취급을 받게 된 '웃음 사망꾼 박명수' 편이었다. 명수는 장례식장의 병풍 뒤에서 조문객들이 뭐라고 하는지 몰래 모니터 한다. 상주인 무도 멤버와 조문을 온 개그맨들이 생전 박명수에 대한 평가를 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그 구성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조문객들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딸 고아리가 아버지를 회상하는 장면이 너무나 생생하게 펼쳐져 박명수가 그랬듯, 마치 아버지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소설 초반에서 화자는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의 행동과 말을 풍자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진지한 행동을 천연스레 묘사하지만 그 바탕에는 '더 배운 자식'의 코웃음 치는 듯한 우월감이 깔려 있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숨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아버지의 해방일지, p.12


처형 직전의 독립운동가 같이 비장한 표정으로 오갈 데 없는 방물장수 여인을 감싸는 아버지.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하지만 '민중'을 생각하며 집 한 칸을 내어준다. 결국 방물장수는 온 가족에 벼룩을 옮기고 '마늘 반접'을 훔쳐 달아났는데 이에 배신감을 느끼기는커녕 '오죽하면 그랬겠냐'하며 안타까워하는 부부다. 화자인 딸 아리는 그런 아버지가 미욱하고 우스워 보인다. 부모의 맹목적인 신념이 안타깝다.


그런데 기실 어머니의 사회주의란 첫사랑, 좀 더 풀어쓰자면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한 자도 인간 대접받는 세상에 불과했다. 신자유주의 대한민국도 그 정도는 해준다.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사회주의란 그저 지나간 첫 남자가, 지나갔으므로 가장 그리운, 뭐 그런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p.21)


사상이란 저렇듯 느닷없이 타인을 포용하게 만드는 대단한 것일까. 내 부모에게는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저 느닷없는 친밀감과 포용이 퍼스트 클래스에 탄 돈 많은 자들끼리의 유대감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p.23)


고아리의 시선이 바로 우리의 시선 아닐까.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 시대에 '사회주의'라니.


순진한 우리 아버지.

어리석은 우리 아버지.

우스운 우리 아버지.


점차 그 태도는 후회와 반성으로 바뀐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아버지의 유골을 손에 쥐고 울음을 터뜨리며 소설이 끝난다. 탄식 같이 폭발적인 사랑이 느껴져 딸이라면 함께 흐느낄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 빨갱이라는 단어에 반감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을까. 참고로 이 책에서 사회주의는 도구로 쓰였을 뿐이다. 나는 대학에 다닐 때 '사회과학학회'에 가입해 사회주의를 공부한 적이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민중의 세계사를 읽으며 유물론을 받아들였고 모태 신앙을 버리기도 했다(지금도 무교다). 물론 지금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지만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그로 인해 생기는 약자들에 대한 이해, 연대하는 마음을 기르기도 했다. 때문에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꿈꾸던 소설 속 아버지와 어머니의 순수한 열망이 마냥 우습지만은 않았다. 숭고해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화자의 말대로 그 좁은 세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연유는 아버지만의 탓만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 년뿐이었다. 고작 사 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옥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을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 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p.252)


화장터에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몸이 아파서 '대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딸에게 고백한다. 남편이 죽어 재가 되어가는 와중에 떠오른 생각치고 어처구니가 없어 보이지만 그래서 더 슬펐고 현실감 있었다. 혁명동지로 만나 고개를 빳빳이 세우며 살던 남편이, 내가 아픈 데도 '오죽했으면' 졸랐을까 싶은 것이다. 그 마음은 연민이다. 내 몸 희생해서 상대의 괴로움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 그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 장면은 전혀 천박해 보이거나 반페미니즘적이지 않았고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눈시울을 뜨끈하게 덥히는 장면은 소설 곳곳에 있다. 지게에 국화를 꽂고 다니는 의외의 아버지 모습, 빨치산 출신 형을 죽도록 원망하던 작은아버지가 장례식장에 찾아오는 장면, 그런 작은아버지와의 추억(가출한 어린 고아리를 달래어 수박을 먹이고 자전거태워오는) 아버지의 뽀얀 시신을 보고 어릴 적 냇가에서 런닝 자국으로 탄 아버지의 몸을 회상하는 장면이 그렇다.


무뚝뚝한 장녀인 나는 주인공 고아리에 자주 나를 이입했다. 소설 속 아버지에게는 사회주의라는 신념이 삶을 지탱했다면, 나의 아버지는 '성실과 절약정신'이 그랬다. 젊은 날 열사병을 앓을 정도로 죽기 살기로 노동을 하면서 번 돈을, 나의 아버지는 평생 무서워서 쓰지 못했다. 산에서 칡을 캐 먹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칠순이 된 우리 아버지는 여전히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이십 대의 나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무덤 속에 돈을 들고 갈 셈인가'하며 궁색맞고 어리석다 생각했다. 그런 나도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의 장례식장이 아닌 마흔을 앞둔 즈음에.


여전히 나는 아버지의 다양한 얼굴을 모르지만, 아버지가 중하게 여기는 신념을 존중하기로 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덕분일까. '오죽하면 그랬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계사라 쓰고 전쟁사라 읽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