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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Jun 17. 2019

고기만 숙성하는 게 아니다


불판에 지글거리는 소고기 한 점을 집어, 소금에 콕! 찍고 입속에 넣는다.

사르르 녹는다. 그래 이맛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름꽃이 활짝 핀 마블링은 질 좋은 소고기의 상징이었다. 맛은 개인의 취향으로 두더라도, 몸에 좋을 리 없다는 건 이제 거의 다 안다. 대안으로 나온 건 숙성육이다. '숙성'은 지방이 부족한 고기의 맛을 살리는 하나의 방법이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과정을 거치면 단백질이 아미노산으로 분해가 된다. 이 과정에 고기가 부드러워지고 감칠맛이 풍부해진다. 감칠맛은 무엇이냐, 흔히 '다시다'로 칭하는 MSG 맛이다. 조개국물을 한 입 떠먹었을 때의 달고 깊은 맛이라고 할까. 나는 감칠맛을 사랑한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건 숙성회다. 활어회는 쫄깃한 식감으로 먹는다면 숙성회는 감칠맛으로 먹는다. 과정이 까다로워서인지 숙성을 하면 값도 올라간다.


그런데 고기나 생선의 맛을 끌어올릴 때만 숙성을 하는 게 아니다. 이 책에 따르면 나만의 유니크한 아이디어, 독창성을 밀고 나가는 데에도 숙성이라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인력관리 분야 세계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애덤 그랜트는 책 <오리지널스>에서 독창성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고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방법을 소개한다. 독창성이란 특정한 분야 내에서 비교적 독특한 아이디어를 도입하고 발전시키는 능력, 또는 그런 아이디어를 개선할 수 있는 잠재력을 뜻한다. 독창성을 조금 비틀면 '특이하고 낯선 것'이다. 그래서 독창성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은 반대에 부딪치고 좌절하고 만다. 이 책에서는 ‘아싸'(Outsider)가 되지 않고도 독창성을 효과적으로 발휘하는 방법을 알려주는데 나는 그 큰 맥락에서 ‘숙성’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숙성은 기다림이다. 그저 기다리는 건 아니다.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또 너무 오래 면 상해버린다.     


씽큐베이션 추천책!


저는 숙성회를 더 좋아합니다만

책에 한 사례로, 인터넷을 할 때 익스플로러를 쓰는 사람과 크롬을 쓰는 사람의 비교가 나온다. 한 경제학자가 고객 상담전화를 받는 3만여 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익스플로러보다 크롬 사용자가 재직기간이 15% 더 길었으며, 실적도 좋았고 고객 만족도도 높았다고 한다. 인터넷을 처음 시작한 때부터 줄곧 익스플로러를 고수해왔던 나는 충격을 받았지만 책에 나온 분석은 일리가 있었다. 익스플로러는 기본값이다. 컴퓨터나 노트북을 샀을 때 처음부터 깔려있으니 그저 쓴다는 것이다. 크롬은 공들여서 일부러 깔아야 한다. 선택이다. ‘이것보다 더 편리한 게 있지 않을까?’하는 합리적인 의심과 약간의 귀찮음을 감수하고 설치하는 행동력이 있어야 한다.


독창성의 가장 큰 특성은 현상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하겠다는 결심이다.

<오리지널스> p.28


기본값(인터넷 익스플로러)은 활어회다. 눈앞의 생선을  회로 떠서 바로 먹기만 하면 된다. 선택(크롬)은 숙성회다. 스스로 필요성을 느껴야 하고 시간을 들여야 한다. 새로운 맛에 대한 호기심이 늘 먹던 활어회가 아닌 숙성회라는 새로운 맛의 지평을 연다.         


묵혀야 장맛이 제대로 난다

책 속에 나온 과학영재들은 과학적인 문제나 해결책을 서둘러 선택하지 않고 생각이 무르익도록 미뤘다. 숙성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자이가르닉' 효과다. 보통 작업을 끝내면 더 이상 그 작업 생각하지 않지만, 도중에 중단하면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 그래서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다. 스티브 잡스가 극찬을 했었다는 '세그웨이'의 실패 사례 역시 성급함을 주의하라는 교훈을 준다. 꼭 선발주자가 아니어도 괜찮다. 오히려 선발주자가 어떻게 하는지 보고 충분히 생각한 후 실행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장을 담갔다면, 그 맛에 대한 평가를 구하는 심사위원도 중요하다. 저자는 경영자보다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과 같은 업에 있는 동료집단에게 받는 것을 추천한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위험회피 성향이 강하지 않고, 열린 자세로 문제를 바라본다. 그래서 객관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양이냐, 질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렇다면, 분야를 막론하고 최고의 독창성을 보여준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책에서는 아이디어를 최대한 많이 창출해낸 사람이라고 한다. 많은 이들이 독창성을 발휘하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단지 몇 개의 아이디어만 생각해내고 그것을 완벽해질 때까지 다듬고 수정하는데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많은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이유는 초기에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뻔한 아이디어를  낼 확률이 높기 때문이라고. 참을성이 부족하면 빨리 결정하고 싶다. 열매가 미쳐 익기도 전에 따버린다.


반면, 최근에 읽은 책 <강원국의 글쓰기>에서는 다소 상반된 이야기를 한다. 저자는 글 고치기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명문을 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한 작품을 수십 년 동안 붙들고 고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수십 수 백 편을 쓰는 것이다. 수많은 글을 쓰다 보면 좋은 작품이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 나라면 전자에 도전하겠다. 후자는 요행수에 기대어야 하기 때문이다.

<강원국의 글쓰기> p. 253


아이디어와 완성된 글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혼란스러웠다. 과연 원석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여기저기 땅을 파야할까? 아니면 볼품없던 원석을 다듬고 또 다듬는 나을까? 글 고치기의 중요성은 완벽하게 동의하지만 다작이 요행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독창성은 수많은 시도 끝에 마침내 꽃을 피운다.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양의 걸작을 작곡한 모차르트는 35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600여 곡을 작곡했고, 물리학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 아인슈타인도 248편의 논문 중 일부만 주목받았다고 하니 말이다.


올인 좋아하면 망한다

저자는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면서도 독창성을 밀고 나가는 방법으로 ‘문간에 발들이기 기법’을 소개한다. 처음부터 강력한 제안을 하기보다는 작은 제안부터 승낙을 얻고 그다음 큰 제안을 해나가는 방법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상대에게 나를 서서히 흡수시켜 무력화시킨다.

또한 혁신을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올인하지 말라고 권한다.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에 양다리를 걸치고 서서히 옮겨가는 방향을 추구한다. 올인해야 성공하는 게 아니라 올인하면 망한다. 눈먼 열정보다는 전략적인 접근법, 전략적 끈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나는 김치도 겉절이보다는 묵은지를 선호하는 숙성파지만, 평소 행동은 오히려 반대였다. 성격이 급해 최대한 빨리 결과를 보길 바랐고, 처음부터 강력하게 밀어붙이지 않으면 전세를 역전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리지널스>는 숙성이 잘 될 때까지 그만 좀 까불고 기다리라고 한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면 실현될 수 없다. 김치찌개를 먹고 싶다고 겉절이를 넣고 끓일 순 없는 노릇이다. 우선 김치가 익어야 한다. 냉장고의 온도와 습도가 잘 유지되고 있는지부터 점검해야겠다.





*함께 생각해볼 문제
Q. 열정을 갖고 밀어붙였으나 실패한 경험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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