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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Jun 26. 2019

네? 갑질이요?

할말하않

작가님 갑질 하세요?
그렇게 살지 마세요!


문자를 받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에이, 그래도 ‘갑질’은 너무 했다. 갑을병정 중 정이나 되면 다행인 방송작가에게 갑이라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의 심정을 너무나도 이해하기에 바로 전화를 했다. 교수님은 화가 단단히 나 계셨다. 연거푸 죄송하다는 말을 해봤지만, 혼만 나고 전화가 끊겼다.

     

방송 일을 하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 원망할 구석이 없을 때가 있다. 이번 상황이 그랬다. 방송 아이템은 제철 맞은 '새우'. 껍질에 있는 키토산의 효능을 밝혀야 했다. 물론 사례 중심으로 가겠지만, 건강정보를 근거 있게 담아야 했기에 전문가 인터뷰가 필수였다. 관련 내용으로 논문을 쓰신 분을 어렵게 찾아냈다. 인터뷰를 부탁드리고자 통화를 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키토산(키틴)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마른 새우 껍질을 갈아서 그 가루에 염산을 붓고 탄산칼슘을 제거하는 등 여러 과정을 거쳐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팀장님과 메인언니에게 알렸고, 두 분은 실험이 너무 좋다며 교수님께 잘 부탁드려 진행해보라고 했다.

      

“교수님, 그럼 촬영 날 저희가 새우를 사 가면 될까요?”     


“그날 사 오면 늦죠. 살은 필요 없고 껍질만 필요하니까 내가 구해놓을게요.”     


“새우 껍질을 구하는 곳이 있으세요?”     


“우리 연구원들이랑 대하구이 한 번 먹지 뭐.”     


본인의 연구가 방송을 타는 게 좋으셨던 걸까? 실험 촬영에 적극적이셨다. 이유야 어쨌건 정말 감사했다. 출연도 감사한데 실험 준비까지 완벽하게 세팅해주시다니. '이런 교수님 또 없어요~'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출연료를 넉넉히 챙겨드려야 한다고 피디에게 거듭 말해두었다.

       

인터뷰 촬영을 다녀온 피디의 테이프를 확인했다. 말씀하신 대로 새우 껍질에서 키토산 가루가 추출되는 게 신기했다. 방송 내용을 좀 더 흥미롭게 보여줄 수 있을 거 같아서 기뻤다. 피디와 함께 마지막 편집 과정인 파인 컷팅을 하며 실험장면을 놓을 자리를 고심했다. 실험을 아무리 압축해도 생각보다 그림이 길었다. 전체 분량 60분을 맞추려면 10분 이상 내용을 덜어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사례자 부분에서 더 빼낼 내용이 없었다. 피디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실험을 빼야겠는데?”     


나는 무슨 큰일 날 소리냐고, 이 실험은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고 떼썼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분량을 맞추려면 1순위로 덜어내야 하는 건 그 실험이 맞았다. 교수님 인터뷰가 있었기에 실험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내용에 지장이 없었다. 우리는 머리를 싸매고 간신히 자리를 찾아 실험을 끼워 넣었고 성공했다며 좋아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30분 후 최종 시사를 받았는데 본사 CP는 실험을 빼는 게 좋겠다고 했다.


본사 CP는 우리의 갑이었다. 보통 외주제작사의 방송 제작진은 페스츄리같은 여러층의 갑을 모신다. 제작사 대표도 갑이고, 본사도 갑이다, CP도 갑이고, 출연자와 전문가, 연예인도 모셔야 했기에 모두 우리의 갑이다. 갑 of 갑은 시청자지만 말이다.     


아무튼 갑님이 실험을 빼라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피디와 나는 최후의 방법으로 실험을 인서트로 넣었다. 교수님이 인터뷰를 하는 모습 하단에 PIP(화면 속 작은 화면)로 흘리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는 교수님이 실험을 열심히 도와주신 걸 알기에 너무 죄송했다. 그래서 미리 분량이 적다고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마땅히 댈 핑계를 찾지 못했고, 깜박 잊고 말았다.     


방송 다음 날, 나는 ‘갑질’하냐는 문자를 받았다. 씁쓸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갑질이라니. 굽신거리는 게 주된 업무라 새우처럼 허리가 휠 지경인데 갑질이라니. 하지만 통화를 하고 나니 교수님의 분노가 이해됐다. 교수님은 방송을 위해 회식을 하셨고 휴무인 연구원을 불러 실험 진행을 시켰다. 얼마나 민망하고 체면을 구겼을까. 그래서 나는 억울하지만 죄송하다는 말 밖에 드릴 말씀이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구성을 잘해서 버려지는 그림이 없으면 좋으련만, 촬영을 하다 보면 어떤 상황이 길어질지 예측하기 힘들다. 별로 뽑을 게 없을 거 같았던 상황이 의외로 재미있어 길어지기도 하고, 예상보다 찍을 게 없어서 엉뚱한 장면을 엿가락처럼 늘려야 할 때도 있다. 이런 상황을 출연자나 시청자는 알 길이 없다. 그저 “재미없어서 편집당했나 보네.” 하고 쉽게 말할 뿐이다.

      

그렇다면 방송작가는 '내 뜻이 아니었다'라고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까. 살다 보면 내 잘못이 아닌데 사과해야 할 때도 있고, 억울한 일도 있기 마련이라며 웃어넘기는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위로가 되는 점은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런 일은 최대한 빨리 털어버리는 게 좋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갑'이라고 여긴 희한한 경험은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 가슴에 묵직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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