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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Jul 22. 2019

여행지에서 타인을 믿으면 생기는 일

썸에서 결혼까지

여행은 늘 우리를 두근거리게 한다. 특히 낯선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는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성공한 ‘여행 덕후’다. 혼자 떠났던 스페인에서 운명처럼 지금의 남편을 만났으니 말이다.     


내가 혼자서도 씩씩하게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건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20대 중반 이후다(아~ 옛날 사람). 처음엔 국내 당일치기로 시작했다. 그 후 경주, 제주도 등에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여 휴가를 즐겼다. 혼자서도 여행이 두렵지 않았던 이유는, 막상 여행지에서 홀로 있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행을 가면 반드시 누군가를 만났다. 내 경우 그랬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다양한 연령과 국적의 친구를 사귀었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거나 함께 밥을 먹었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는 틀림없이 누군가가 나타나 도와줬다. 어쩌면 나에게 여행이란 ‘낯선 사람을 친구로 만드는 모험’ 일지도 모르겠다.      


남편과의 만남도 그랬다. 당시 나는 해외여행을 혼자 가는 게 처음이라 무척 긴장했었다. 세 달 전부터 생존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촘촘하게 동선을 짰다. 그리고 2016년 2월의 어느 날,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그를 만났다. 깜깜한 밤에 셔틀버스까지 놓쳐 호스텔 가기가 막막하던 참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는 나와 같은 호스텔이었고, 2주 간의 여행루트까지 거의 같았다. 나보다 나이는 4살 어리지만 영어실력이 뛰어났다. 영어가 약한 나는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가 감기로 고생할 땐 내가 가져간 비상약이 힘이 됐다. 그렇게 만난 인연은 한국에 와서도 계속됐다.     


여행을 사랑하며 여행지에서 평생의 반려자까지 만난 나는,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여행의 이유》 출간 소식이 무척 반가웠다. 소설《검은 꽃》,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작가는  시공간을 마음껏 주무른다. 그런 그에게 여행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책 속에 나오는 김영하 작가의 유년시절과 대학시절 에피소드는 그가 소설가이기 전에 여행자로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그에겐 흔히 말하는 ‘역마살’이 있었다. 아버지의 일 때문에 학창 시절 1년에 한 번 꼴로 이사와 전학을 했다.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등 우리나라 지도를 훑어가며 이동했다. 결혼 전까지 서울 하늘 아래, 한 동네에서만 30년 넘게 살아온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 과정에 겪어야 했던 수많은 이별과 적응기간은 어린 소년이 감내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작가는 이러한 생활을 ‘강제이주’라고 표현했다. 주체적으로 하는 여행 대신, 떠밀리듯 떠나야 했던 그는 일상보다 여행에서 오히려 안정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어떤 인간은 스스로에게 고통을 부과한 뒤, 그 고통이 자신을 파괴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때 경험하는 안도감이 너무나도 달콤하기 때문인데, 그 달콤함을 얻으려면 고통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 중략…)
그래서 나는 어디로든 떠나게 되고, 그 여정에서 내가 최초로 맛보게 되는 달콤한 순간은 바로 예약된 호텔의 문을 들어설 때이다. 벨맨이 가방을 받아주고 리셉션의 직원은 내 이름을 알고 있다. ‘나는 다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제 한동안은 안전하다.’

- 김영하,《여행의 이유》p.61-     


정말 그렇다. 여행에서 가장 설레는 순간을 꼽으라면, 비행기 이륙 순간과 첫 숙소 체크인할 때가 아닐까? 두 순간은 굉장히 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연결돼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나는(작가는‘노바디의 여행’이라 칭한다) 이륙은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림자가 없는’ 이방인처럼 외롭다. 반면 ‘상처를 몽땅 흡수한 집’과는 다르게 매일매일이 새로운 호텔. 그 본질은 낯설지만 나를 받아준다는 점에서 안심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유를 찾아 떠나면서도 끊임없이 나를 확인하면서 확장하고 싶은 거다. 타인의 인정을 통해 나의 존재를 느끼고 싶고, 그것은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는 쉬이 느낄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삶의 안정감이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것. (… 중략…) 그가 여행에서 정말로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삶의 생생한 안정감입니다.

- 김영하,《여행의 이유》p.60 -     


게다가 여행은 그러한 과정 속에서 예상치도 못한 선물을 안겨준다. 그 선물은 흥미롭게도 보통 내가 희망하고 바라던 모습은 아니다. 그래서 때론 실망하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진다’(p.51).   

  

나 역시 여행에서 남편을 만나는 바람에 ‘인생의 행로’가 바뀐 사례다. 나는 당시 첫 해외여행지였던 스페인에 완전히 꽂혀버렸다. 2주 여정이었던 티켓을 변경해 여행비자의 마지노선까지 늘렸다. 당시 ‘썸남’이었던 남편은 2주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먼저 돌아갔다.


나는 남은 두 달 반 동안 바르셀로나의 한 호스텔에서 오전에 체크인과 조식 준비를 도우며 숙식을 해결했다. 오후에는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 곳곳을 탐닉했고, 시체스, 타라고나, 지로나 등 당일치기 근교 여행을 했다. 호스텔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프랑스 파리 여행도 다녀왔다. 일주일간의 파리 여행을 마치고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을 때, 나는 깊은 안도감과 함께 바르셀로나가 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휴.. 파리 여행은 너무 피곤했어.
역시 집(바르셀로나)이 최고야!


나는 바르셀로나에 있는 동안 ‘썸남’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고 한국에 돌아가면 꼭 다시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바르셀로나 생활이 너무 즐거웠기에 이곳에서 점점 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현지에 정착한 한국인 언니에게 진지하게 어학원 등록 등 체류할 수 있는 방법을 상담하기도 했다.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바르셀로나 어학원을 등록한 후 다시 바르셀로나로 갈 참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보란 듯이 틀어졌다. 한국에서 다시 만난 ‘썸남’과의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두 번째 고향’ 스페인을 추억의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두기로 했다.     


스페인 생각만 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모든 여행자가 그러듯이, 우리 역시 눈앞에 나타난 현실에 맞춰 고정관념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김영하,《여행의 이유》p.43 -      


김영하 작가가 말하는 ‘인생의 행로’보다 어쩌면 더욱 바꾸기 힘든 건 고정관념 일지 모른다. 여행은 고정관념을 바꾸는 좋은 기회다. 나는 ‘프랑스 사람들은 불친절하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었다. 그래서 파리를 갈 때 마음가짐을 단단히 했다. 그곳의 사람들이 나에게 퉁명스럽게 대해도 상처 받지 않으려고 마음을 꽁꽁 무장했다. 하지만 그런 방어막은 불필요했다.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아 숙소를 못 찾고 헤매자, 한 남성은 흔쾌히 폰을 빌려줬다. 에펠탑을 보려고 탔던 메트로에서 길을 잃었을 때도 한 여인이 나서서 도와줬다. 두 아이와 함께 있던 그녀는 서투른 영어로 소통하는 대신 나를 올바른 플랫폼까지 직접 데려다줬다. 나는 그녀 덕분에 공항을 가기 전 아슬아슬하게 에펠탑을 보고 떠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파리 근교에 산다며, 혹시 또 여행을 오거든 놀러 오라고도했다. 이메일 주소까지 적어서 나에게 건넸다. 나는 한국에 돌아와 그녀에게 에펠탑을 배경으로 찍은 나의 사진을 메일로 보내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나는 풍문으로 얻은  ‘프랑스 사람은 불친절하다’는 고정관념을 여행을 통해 깰 수 있었다.


저자는 북유럽을 여행하던 중에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그제야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당황하는 그녀 대신 현지인 할머니가 버스요금을 내주었다. 나중에 갚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자기에게 갚을 필요 없다, 나중에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에게 갚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환대는 이렇게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그럴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 김영하,《여행의 이유》p.147 -     


김영하 작가 역시 여행지에서 타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파리 오를레앙행 열차에서 한 여성이 좌석을 두고 시비를 걸었을 때 대신 싸워준 이들을 기억한다. 발리 우붓에서 잊지 못할 현지 여행 경험을 안겨준 ‘뉴먼’이라는 남자를 기억한다. 김영하 작가는 낯선 사람을 믿었고, 낯선 이는 그 보답으로 환대를 베풀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스페인 남부 작은 도시 말라가 여행을 할 때였다. 자전거를 렌트해 말라게타 해변을 돌다가 곧 버스시간이 다됐음을 알았다. 돌아가려는 순간, 자전거 체인이 바퀴에서 빠져버렸다. 나는 당황해서 자전거를 세워두고 이리저리 체인을 끼워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쪽이 들어가면 한쪽이 자꾸 빠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초조했다. 그때 트럼펫을 부는 악사가 눈에 띄었다. 다소 험상궂은 외모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유일한 구원자라는 걸 직감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트럼펫을 내려놓고 다가와 맨손으로 체인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마침내 자전거에 끼웠다! 여행자를 도운 그의 손은 기름으로 까맣게 물들었다. 나는 감사함을 표시하며 셀카를 찍자고 황당한 부탁을 했다. 나를 도와준 사람의 얼굴을 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선뜻 내 청을 들어줬다. 시간에 쫓겨 이름을 못 물어본 것이 지금도 아쉽다.     


말라게타의 망할 자전거, 그리고 친절한 악사 아저씨


내가 여행을 떠올리면 설레는 이유는 이런 것들이다. 도움을 청하면 흔쾌히 도와주는 낯선 사람이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나도 누군가를 돕는다. 그러면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 나 역시 환대를 순환하는 일원임이 뿌듯하다. 

  

내가 여행만큼 설레고 좋아하는 일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독서다. 특히 소설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김영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여행은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도 소설과 닮았다. 설렘과 흥분 속에서 낯선 세계로 들어가고, 그 세계를 천천히 알아가다가, 원래 출발했던 지점으로 안전하게 돌아온다. 독자와 여행자 모두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 그게 무엇인지는 당장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일상으로 복귀할 때가 되어서야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 김영하,《여행의 이유》p.204~205 -     


여행은 책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 변화는 보통 체감하지 못하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깨닫는다.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리면 생각지 못한 새로운 길이 펼쳐져 있다. 나는 인생이라는 긴 여행을 하는 동안, 짧은 여행들을 반복하며 그 경로를 계속해서 수정할 것이다. 그리고 최종 목적지에서 분명 환대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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