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 필요해
1958년 어느 작은 방에 중년의 여성과 10대 소년이 한 침대에 누워있습니다. 소년의 손에는 책이 들려 있습니다. 여인은 소년이 들려주는 책을 들으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15살 미하엘과 36살 한나입니다. 창에서 햇살이 방을 비춥니다. 여인의 몸짓은 신비로웠고 소년은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두 사람은 만나 사랑을 하고 책을 읽고 듣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한나는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소년은 절망합니다. 1966년 법대생이 된 미하엘은 법정견학에서 한나를 마주합니다. 한나는 독일 나치의 친위대 소속으로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가는 사람들을 선별하여 보내는 일을 했습니다. 법정에서 다른 전범들은 모두 본인들이 한 일을 부인합니다. 한나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한나는 강제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일했습니다. 감시원들은 행군이 있었을 때 수감자들을 마을 교회에 감금시켰습니다. 그곳에 폭탄이 떨어져 그 안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녀는 그 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습니다. 판사는 증거인 보고서의 내용을 대조하며 신문합니다. 그리고 모든 피고인들은 ”저 여자가 보고서를 썼어요. “라며 슈미츠부인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한나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합니다. “ 그 사실은 화자만 알고 있습니다. 검사는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대조해 보자고 합니다. 그녀는 ”내가 그 보고서를 썼다 “고 인정합니다. 여러분은 한나의 이 선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보고서는 그들이 그날 밤에 행하고 수행하고 겪은 일들을 사실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중략) “저 여자가 보고서를 썼어요. 저 여자한테 모든 책임이 있어요. 다 저 여자가 한 짓이에요. 그래서 저 여자는 그 보고서로 모든 것을 감추고 우리를 끌고 들어가려 한 거예요.” (p.161) “아닙니다.
제가 쓰지 않았습니다.” 한 검사가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보고서에 쓰인 필체와 피고인 슈미츠의 필체를 비교해 보자고 제안했다.(중략)“전문가까지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그 보고서를 썼다는 사실을 시인합니다.”(p.165)
한나는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리기를 수치스러워합니다. 미하엘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한 것도, 수용소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책을 읽게 한 일도, 미하엘과 여행을 가서 모든 것을 그에게 결정하도록 한 일도 글을 쓰고 읽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나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다른 사람들한테 책을 읽어달라고 했던 것이다.“(p.168)
재판에서 불리한 줄 알면서도 ‘문맹’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모든 죄를 시인합니다. 그녀는 무기수로 감옥에 갇힙니다. 미하엘은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판사에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미하엘의 이런 태도에 공감하시나요?
어른들의 경우에는 내가 그들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좋다고 여기고 있는 것보다 더 우위에 두려고 하면 절대 안 된다."(p. 180)
"네가 상대방을 위해 무엇이 좋은 건지 알고 있고 그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너는 당연히 그 사람이 그에 대해 눈을 뜨도록 해주어야 해. 물론 최종 결정 은 본인한테 맡겨두고서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 사람과 직접 말이야. 그 사람 등 뒤에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단다." 한나와 직접 이야기한다고?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나? 그녀가 평생 동안 해온 거짓 말을 내가 눈치챘다고? (중략) 그 거짓말은 그만한 희생을 치를 만한 가치가 없다고? (중 략) 그녀에게 장래의 삶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내가 그녀에게서 그녀의 평생 거짓말을 앗아버릴 수 있는가?(P.182)
나는 한나를 찾아가는 일은 해내지 못했다. (p.201)
한나에게 있어 문맹임을 드러내고 무죄임을 증명한다면 한나는 행복할까요? 미하엘은 그 사실을 침묵함으로써 행복할까요? 두 사람은 두 가지 상황 모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화자는 나치 정권에서 부모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일을 하지 안 “았으며 ”1945년 이후 그 범죄자들이 자신들과 함께. 사는 것을 묵인“해 준 독일 사회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부모 세대와 아이들 세대 모두 연대책임이라는 ”하나의 경험적 현실이었다. “라고 말하는데요. 우리가 ”손가락으로 죄를 저지른 사람“을 가리킬 수는 있지만 그것은 내면을 ”수치심으로 가득 채웠다. “고 주장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우리가 손가락질을 하여 ”수치심으로 인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데요. 여러분은 화자의 이런 견해에 공감하시나요?
나는 지금도 가끔 나치와의 대결을 이들 학생운동의 근본적인 동기가 아니었으며 학생운동의 기본적인 추진력을 형성한 세대 간의 갈등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세대에게 중압감을 줄 뿐인 부모들의 기대는 이 부모들이 제3 국 치하에서 또는 늦어도 제3 국이 망하고 난 뒤에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 정단성을 잃고 말았다. 나치 범죄를 저질렀으나 수수방관했거나 그로부터 눈을 돌렸거나 1945년 이후 범죄자들이 자신들과 함께 사는 것을 묵인해 주었거나 심지어 그것을 수용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p.213-214)
연대책임이라는 것이 (……) 우리 학생 세대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경험적 현실이었다. 우리가 손가락으로 죄를 지은 사람 당사자들을 가리킬 수 있다고 해도 우리 가슴속을 수치심으로 가득 채웠다.(p.214)
과거 부모 세대의 범죄를 안고 살아가는 자식들에게는 큰 아픔일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살아가며 도덕성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되뇌어도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연대책임이라는 말이 그들을 무겁게 짓누를 것입니다. 독일은 이후로 역사 교육을 철저히 합니다. 역사적 장소 또한 그대로 보존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반드시 보여준다고 합니다. 역사 속에 개인은 희생되고 처참하게 추락합니다. 한나도 미하엘도 역사의 피해자입니다. 한 개인의 욕망으로 인류 전체가 고통받았습니다. 우리가 사유하고 성찰하며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