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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이어 Apr 24. 2024

공생, 상생

한 지붕 두 가족

조심조심 비좁은 베란다로 빨래를 한 아름 들고 안쪽으로 들어간다. 화분들이 늘어서 있어 옷가지에라도 걸리면 안 된다. 바짝 긴장한 몸으로 빨래를 나른다. “쿵!” “헉” 상상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보고 싶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그만 옷가지에 걸려 애기가 탁자 아래로 엎어졌다. “어떻게!” 빨래를 안방 창문에 던져놓고 엎어진 화분에게 다가갔다. 처참한 몰골의 화분들. 무성한 잎들이 꺾이고 흙이 바닥에 쏟아져버렸다. 핑크빛이 도는 화분은 반으로 갈라져 안에 있던 흙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울고 싶었다.

초록이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다행히도 많이 상하지 않은 듯 (몇몇 가지들이 꺾인 것을 제외하면) 초록잎은 여전히 무성했다. 비어있는 화분을 서둘러 찾았지만 남아있는 화분은 없었다. 화분들을 보다 워터 코인이 눈에 들어왔다. 큰 집에 비해 왜소하게 보인 워터코인. 워터 코인을 조심스레 들어내고 그곳에 애니시다를 옮겨 심었다. 워터코인은 조금 작은 플라스틱 화분으로 옮겼다. 워터코인에게 방을 내어준 애니시다가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과 방을 빼앗긴 워터코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교차한 순간이었다. ‘미안…….’

어느 날 애니시다 화분에서 파란 새싹이 돋았다. 뭘까? 며칠이 지나고 나니 워커코인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한 지붕 두 가족이다. “이런, 어쩐다, 괜찮을까?‘ 걱정은 됐지만 가끔 화분에 잡초가 자라는 경우가 있었던지라, 그냥 두기로 했다. 잡초도 생명이니 뽑지 않았던 나로서는 그 아이들도 그냥 두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워터코인이 아래층을 다 잠식하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애니시다가 잘 못 자랄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엄습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두 아이를 분리하기로 했다. 화분에서 꺼내보니 워터코인이 애니시다를 꽁꽁 묶어두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옮겨심어야겠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지라, 워터코인을 잡아떼어내고 애니시다를 아기 다르듯 조심스럽게 다시 심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다.

애니시다는 시들시들 앓더니 초록색잎은 어느새 국방색을 띠고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결국 그 아이는 유명을 달리했다. 또 울고 싶었다. 애지중지 키우던 그 아이에게는 소망이 있었다. 올봄에는 꽃을 보리라 다짐하며 열심히 가꾸었던 것이다. 슬펐다. 그리고 한 달쯤 화분을 방치해 두었다. 속상해서 한쪽으로 방치했다. 앗! 화분에서 워터코인이 빼꼼히 자라며 강인한 생명력을 뽐내고 있었다. “운명이군. 너의 집을 끝까지 사수하는구나. 내가 미안했네. 미안. “ 집을 빼앗긴 워터코인은 본래의 집과 다른 집까지 차지하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애니시다는 끝내 잎을 틔우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의 갈 길이 달랐다. 하나의 공간을 잃고 다른 공간에서 우연히 둘이 함께 자라 서로 다툼이 있었지만 서로를 응원하며 컸을 것이다. 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누군가의 개입으로 그 공간을 두고 쟁탈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하나의 승자만이 그곳을 차지할 수 있었다.

삶도 다르지 않으리라 수많은 경쟁을 통해 저마다의 공간을 만든다. 더 큰 공간을 차지하고 뽐내며 서로가 서로를 잠식한다. 그곳에서 내몰리지 않기 위해 뜻을 같이하거나 힘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연대하며 권력을 지켜낸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 일이다. 작은 화분은 힘의 논리에서는 자연적 현상으로 생명력에 의해 결정되지만 인간사는 그렇지 않다. 한 지붕 두 가족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상생과 공존이 있다. 애니시다와 워터코인은 공생을 바랐을 것이다. 인간의 개입으로 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인간사에서는 충분히 가능할 일이다. 현명한 지도자의 판단만 따른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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