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숲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과거의 나는 어디 갔을까? 지금의 나는? 아이들이 부르는 ‘엄마’, 남편이 부르는 ‘자기’, 친정 엄마가 부르는 ‘지선아’, 시부모님이 부르는 ‘큰며느리’, 학생들이 부르는 ‘선생님’, 지인들이 부르는 ‘누구의 엄마‘다. 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이름이다. 이 모든 것들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나를 드러낸다. 고신영복 선생이 말한 관계론이 이런 것이리라. “정체성이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입니다. 정체성은 본질에 있어서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생성(being)입니다. 관계의 조직은 존재를 생성으로 탄생시키는 창조적 실천입니다.”(p.246 <신영복평전>중에서)
과거의 나를 보여주는 이름은 변화된 나를 보여준다. 모든 관계는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적극적인 활동은 더욱더 나를 명확하게 만든다. 결혼 후에 아이를 낳아 누구의 엄마였고, 일을 시작하며 여러 명칭들이 앞에 붙는다. 활발한 활동 덕분에 나를 드러낸다. 나의 이름 석자가 더 많이 불려진다. 주부로서의 삶만 살았다면 나의 이름은 ‘누구의 엄마‘로만 존재했을 것이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훌쩍 커버린 아이들로 인해 ’ 엄마‘라는 이름도 퇴색되어 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일을 하고 책을 읽으며 사유를 한다. 어떠한 관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나를 만들어간다.
내가 책을 읽고 쓴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브런치에 글을 쓰며 인스타에 적는다. 공유하는 모든 일들은 사회와 관계를 맺고 소통하며 실천하는 일환이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재이유를 드러낸다. 또한 나에서 벗어나 주변과 관계 속에서 행동하는 일은 관계를 더욱 확고히 하게 한다. 줌으로 만나 이야기하고 글을 쓰는 네트워크도, 현장에서 만나는 수많은 아이들과 가족들과도 촘촘한 그물로 연결되어 관계를 맺는다. “나무는 낙락장송이나 천하의 명목이 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무들과 함께 숲을 이룸으로써 완성된다.”(p.253)(<신영복평전>중에서) 우리들의 관계도 이런 것이리라. 한 그루의 나무에서 서로의 뿌리를 넓히고 지탱하도록 도우며 숲을 이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