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 잘 어울리는 형용사는
우리말놀이 (2) 너희를 닮고 싶어서
내가 얼마나 무식한지 스스로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우리나라 역사나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설명할 수 없을 때, 아주 단순한 수식조차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상식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내가 이 경쟁사회에서 입때껏 도태되지 않고 살아왔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여겨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나의 무식함을 들킬라치면, 마치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한 것처럼 쇼를 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 부끄러움도 덜해지고 "사람이 세상만사를 다 알 수는 없는 거고, 이미 알았던 것인데 세월이 지나면서 잊어버린 것일 수도 있지." 하고 스스로 면죄부를 주면서부터는, "그래? 몰랐는데?" 하고 쿨하게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 때까지 그렇게 몰랐던 것 중의 하나가 '미학'(美學)이다. 미학과라는 과가 있다더라, 하는 것까지는 들어 알았지만 도대체 그게 인문대학에 있는지, 미술대학에 있는지, 음악대학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런 내가 아이들에게 우리글을 어떻게 깨우치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유아교육의 미학적 접근'이라는 방법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 생소함이란.
유아심미교육학회던가, 유치원의 놀이 중심 심미 수업을 연구하는 단체에서 주관한 연수회에 참석하러 주말마다 부산에 다녀온 적이 있다. 누리과정이 놀이 중심 교육으로 개편되기 훨씬 전이다. 한 주간 동안 일하고 쉬고 싶은 주말이지만, 새벽부터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갔다.
연수회에서 들은 내용은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보육교사 교육원을 다니면서 했던 공부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이전 교육에서는 교사에게 가르침을 받아 자라는 유치하고 미완성적인 존재로서 아이들을 바라봤다면, 여기에서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달랐다. 공동육아는 아이들을 부족함 없는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고, 아이들이 그 내부에서 배움을 이끌어낼 수 있는 존재라고 믿었다. 공동육아와 똑같지는 않지만 아이들에게 내적 동기와 흥미를 불러일으켜 줄 만한 과정으로 '내러티브'(이야기)를 말한다던가, 상상력을 불러올 영상과 심미적 언어를 사용한다던가 하는 부분 등 아이들을 각별히 존중하는 태도는 같은 맥락으로 보였다. 교사가 만나는 아이들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교육과정이라면 여기에서 반드시 도움을 받을 게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후 우리말놀이를 정리해 가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만들기, 아이들의 이타성(利他性)에서 시작하기, 아름다운 영상으로 접근하기가 미학교육에서 차용해 온 방법들이다. 공동육아에서도 이미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교육과정이 있으니, 가장 먼저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말놀이 두 번째 시간인 오늘, 아이들에게 그렇게 만들어 낸 이야기의 첫 장을 넘기는 날이다.
"얘들아, 너희들 이야기 듣는 것 좋아하지? 이제부터 내가 아주아주 긴~~~~ 이야기를 들려줄 거야. 들을 수 있겠어?"
교사들은 낮잠 전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곱 살쯤 되면 자리에 누워도 바로 잠이 들지는 않는지라, 아이들은 언제나 긴 이야기를 요구했다. 그 이야기가 길든 짧든 상관없이 아이들은 다 듣고 나서 "너무 짧아! 하나 더 해줘!"라고 했다. 공연 후에 으레 '앙코르'를 외치는 것과 유사한 반응이다.
그러나 길든 짧든 상관없이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곯아떨어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아이들에게 이야기는 자기 전에 듣는 오디오북 같아서 더욱더 달콤하게 잠을 부를 뿐이다. 그러니 '긴~~~ 이야기'라는 내 말에 아이들의 반응은 양극으로 갈릴 수밖에.
"아싸~! 좋아!!"
"으잉. 나는 잘 못 들을 것 같은데."
"그래. 잘 못 들을 것 같고 힘든 친구들은 날 봐봐. 내가 잘 들을 수 있는 힘을 준다! 자 받아!"
귀에서 뭔가 꺼내는 척을 하면서 손가락 하트를 만들어 날렸다.
뭔가를 준다는 말에 나를 쳐다보고 있던 아이들이 "나도, 나도!"라며 손을 내민다. 내가 진짜 뭐라도 준 것처럼.
첫날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왜 만들고 싶어 했는지를 주제로 만든 이야기로 시작한다.
가난했지만 아내와 아이와 함께 살던 다복했던 소금장수가 숯장수의 꾐에 빠져 길을 잃게 된다. 아내와 아이는 아빠를 찾아 나서지만 만나지 못하고 장터에서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아빠의 초상화를 그린다. 아빠는 멀리 떨어진 마을의 대감 집에서 일 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강구한다. 그러다 초상화를 들고 대감 집을 방문한 방물장수의 도움으로 아내와 아이 소식을 듣게 된다. 아빠는 대감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 년 뒤에 돌아가기로 하고, 대감에게 부탁하여 편지(한자)를 써 보낸다. 편지를 받은 아내와 아이는 반가운 아빠 편지를 들고 마을 훈장에게 읽어주기를 부탁하는데, 훈장은 자기가 한자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아는 글자만 읽어줌으로써 아빠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상심한 아내와 아이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 일 년 후 아빠는 머슴살이를 마치고 꿈에도 그리던 집에 돌아오지만 아내와 아이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 숯장수의 꾐에 빠졌던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자책하다가 아빠도 병에 걸려 죽는다.
소금장수의 슬픈 사연을 전해 들은 세종대왕은 아내와 아이(모든 백성)가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를 만들 방법을 고민한다. 책에서 찾지 못한 세종대왕이 고뇌 속에 잠들자, 백성을 향한 임금의 마음을 기특하게 여긴 산신령이 꿈에 나타나 글자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데....
줄거리만 쓰자면 열서너 줄로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아이들에게 들려줄 때는 거의 삼십 분 가량 걸린다. 아이들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스케치북 그림을 이용한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다.
"너희들 숯장수 알아? 옛날에는 숯이라는 게 있었는데..." 하며 모르는 낱말 풀이해 주랴, "어? 저거 중국말인데? 저거 타프캎ㅎ*&^%&^라고 읽는 건가?" 장난스럽게 끼어드는 말을 너도나도 따라 하면서 흥분하면 분위기 다시 가라앉히랴, "야~ 일어나지 마. 그러면 나 그림 안 보여." 하면서 자리다툼을 하는 아이들의 갈등을 정리해 주랴, 바쁘다 바빠.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흥미를 잃지 않게 중간중간 "소금장수 불쌍하다, 그지?" 하고 추임새도 넣어주어야 한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해 스케치북 그림을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버려지는 그림책의 그림을 오려 재활용했다.소금장수 이야기는 도입에 불과하고, 앞으로는 세종대왕이 어떻게 '천지인(天地人)'의 원리에 근거해서 한글을 만들게 되었는지로 이어질 것이다. 그 이야기들에는 소금장수 이야기와는 달리 '악인' 캐릭터가 없다. 오로지 어려운 상황을 서로 도와주는 착한 백성들의 이야기로만 만들었다. 아이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 아니 모든 생명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타적인 존재들이기에, 아이들이 더 잘 이해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동육아 교사대회가 있었던 어느 해, 무슨 주제로 모둠 토론을 하였는데 한 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전 정말 아이들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자기밖에 없어요. 자기가 때린 건 말하지 않고 자기가 맞은 것만 말한다니까요."
나 역시 그다지 훌륭한 교사는 못 되었지만, 그 말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아직 자기중심적인 것은 맞죠. 그러나 아이들이 이기적인 존재라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네요. 아이들만큼 이타적인 존재도 없어요."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아이들은 힘들어하는 친구를 어떻게든 돕고 싶어한다. 자기 신발도 바꿔신으면서 친구 신발을 신겨주려하고, 햇볕에 나온 지렁이가 더워하지 않게 그늘로 데려다준다. 심지어 부모가 이혼을 해도 자기 탓을 하고, 부모가 바라는 대로 살려고 자기 욕구를 억누르지 않는가!
아이들의 본성을 잘 설명해 주는 형용사들이 있다. 작다, 귀엽다, 아름답다, 사랑스럽다, 착하다 등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곱다'는 말이 아이들에게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는 어른들과는 그 결과 질이 확연히 다른 이타성이 있기에 그렇다. 자기에게 되돌아올 것을 계산하지 않고, 그저 상대방이 어렵고 딱하기 때문에 베풀게 되는 그런 고운 마음. 그 말이 아이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형용사가 아닐까 싶다.
고작 일곱 살인데, 이렇게 앉아서 삼십 분 넘게 귀 기울여 듣다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훌륭한 너희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