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알면 소리가 들리지
우리말놀이(4) 땅에 담긴 소리
내 오랜 친구가 그랬다. 자기한테는 인생에서 특히 더 고마운 사람이 둘이 있다고. 그분들은 자기를 전혀 알지 못하지만, 자기는 그분들이 꼭 필요할 때면 언제든 만날 수 있고, 그분들의 조언을 따를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그래서 그 두 분이 도대체 누군데?"
"한 명은 법륜 스님."
"아하, 그래? 인정! 난 천주교 신자이기는 하지만 법륜 스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고맙지. 그럼 또 한 분은?"
"백종원!"
뜻밖의 인물이라 웃음이 터졌지만, 내 친구가 그렇다는데야. 한동안 반찬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친구로서는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친구와 대화를 나눈 뒤, 나도 걔처럼 나를 알아주지 않지만 나 혼자 고마워하는 사람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사람의 인품과 도덕성은 물론, 경제력, 권력, 학식까지 두루 검증되어 객관적으로 존경받고 칭송받아 마땅한 그런 사람 말고, 그저 내 필요에 의해 '갖다 쓸'(?) 수 있는, 주관적으로 고마운 그런 사람은 없는지.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외국인 할배,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었다. 내 삶이 흔들릴 때마다 아주 쉽고 간결하게 길을 알려주고, 무엇보다 자신의 삶으로서 모범이 되어주는 양반. 내 친구에게 법륜 스님과 같은 존재가 나한테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다. 그럼 반찬가게에 내놓을 적당한 레시피가 떠오르지 않아 끙끙거릴 때 늘 새로운 영감을 얻게 해 준다는 백종원 같은 사람은 있을까?
천지인 두 번째 시간인 '땅 소리' 수업을 준비하면서 끙끙거리고 있을 때 문득 '그'가 떠올랐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 노란 곱슬머리의 작은 아이, 어린 왕자. 그 아이는 중요한 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고도 했다.
문득, 중요한 건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소리도 마음으로 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들 말고, 마음을 던져 넣어야 비로소 들을 수 있는 소리의 세계가 있지 않을지. 아이들에게 '땅의 소리'를 알려주고 싶었던 내게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했다. 필요할 때 가볍게 갖다 쓸 수 있는, 아주 쉬운 비법을 담은 백종원의 레시피였다.
작년까지는 땅 소리를 이야기하면서 '소리 동굴'이라는 활동을 했다. 옛이야기에서는 "엄마가 산속에서 큰 비를 만났는데, 그 비를 피할 만한 동굴을 발견하게 됐다, 그 동굴을 따라 땅 속 깊이 들어가니 소리로 둘러싸인 공간이 나왔고, 거기에서 땅 위에서 울리는 여러 소리를 듣게 됐다"는 이야기를 했더랬다. 이야기를 해준 다음에는 여럿이 어깨를 겯고 사람 동굴을 만들어 소리의 울림을 들어보는 활동을 했다.
그렇게 몇 년 진행을 하기는 했는데, 올해는 유달리 이야기가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소리 동굴을 만들어 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어 하기는 했으나, 그보다 한층 더 아름다운 상상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직접 텃밭을 일구고, 밖에 나가 놀면서 흙을 원 없이 만져보고 사는 아이들이라 굳이 수업 시간 중에 흙을 만져보게 할 필요도 없었다.
'옳거니, 아이들이 알 만한 땅의 소리, 그러나 귀로는 들리지 않고 마음으로 상상해 볼 수 있는 그런 소리를 찾아야겠구나!'
아이들 수대로 스무 개의 '들리지 않는 소리'를 찾았다. 아이들이 자기 둘레에서 경험한 들리지 않는 이 소리들을 어떻게 마음으로 듣고 몸으로 표현해 낼지 궁금했다.
지렁이가 기어가는 소리 / 나비가 알 낳는 소리 / 소금쟁이가 걷는 소리 / 꽃잎이 벌어지는 소리 / 바다에 물안개 피어오르는 소리 / 함박눈이 쌓이는 소리 / 바닷속으로 해님이 자러 가는 소리 / 물고기가 꼬리를 흔드는 소리 / 잠자리가 꽃잎 위에 내려앉는 소리 /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소리 / 민들레 씨앗이 날아가는 소리 / 애기똥풀이 색깔을 만드는 소리 / 나무에 새싹이 돋는 소리 / 공벌레가 몸을 웅크리는 소리 / 날아가는 새가 똥 누는 소리 / 바닷속 물풀이 춤추는 소리 / 열매에 빛이 스며드는 소리 / 모래밭을 맨발로 걸어가는 소리 / 봄날 아지랑이 올라가는 소리 / 조개가 입을 열어 하품하는 소리
아이들에게 제시한 '마음으로 듣는 소리 카드'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많으므로 적당한 그림을 그려야 했는데, 역시나 어른에게는 글자가 그림보다 훨씬 쉽다.
정성껏 카드를 만들었다. 속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주머니에 카드를 담았다. 한 명씩 나와서 카드를 뽑은 뒤, 그 카드에 쓰인 내용을 말 없이 몸으로만 표현해 보도록 했다. 아직 글자를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귓속말로 내용을 알려주었다.
친구들이 맞추지 못하니까 답답해하기도 하고, 그만 입으로 "후우~"하거나 '아함~!"하며 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공벌레가 몸을 움츠리는 모습, 날아가는 새가 힘주어 똥 누는 모습 등을 표현할 때는 얼마나 금세 맞추던지, 문제를 내던 교사들이 깜짝 놀라기도 했다.
처음에는 "난 안 하고 싶어."라고 하던 아이도 어느 틈엔가 "나, 나 시켜줘." "한 번 더 하고 싶어."라고 말하며 손을 번쩍번쩍 들었다. 별것도 아닌, 아주 단순한 극놀이에 금세 빠져든 아이들이다. 기쁘다.
'좋아! 땅 소리도 미션 클리어!'
최선을 다해 몸으로 표현해 보려고 했던 아이들이 예쁘고 기특해서 나도 수업을 기분 좋게 정리한다.
'그래, 내년에도 필요하면 그때 또 만들어 쓰면 되지~ 오늘은 기분이다!'
"얘들아, 이 카드는 너희들 줄게. 나중에 또 갖고 놀아."
하늘, 땅, 사람.
천지인은 장소의 개념만이 아닐 거다. 땅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가장 구체적인 세상이다. 오감으로 만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세상이랄까. 그래서 땅에서 들리는 소리는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뿐 아니라,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움직이고 살아가는 소리까지 포함하는 것 같다. 이 넓디넓은 세상은 들을 수 있는 소리보다 들리지 않는 소리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를 일.
귀로 들을 수 없지만 마음을 두고 들.어.본.다.면(들음과 동시에 보기도 하는 행동), 그 존재에 더 가까운 본질적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귀로 들리지 않는 소리까지 잘 들을 수 있는 사람이 결국 다른 사람의 말에, 마음에, 행동에, 태도에 더 귀를 잘 기울일 수 있지 않겠나.
나는 그중의 아주 작은 소리 스무 가지에 아이들과 함께 귀를 기울여 보았을 뿐이지만, 오늘 어항 속에서 헤엄치고 다니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어제와는 조금 다르다. 물속에서 힘차게 꼬리를 흔드는 그 소리를 들을 것도 같다. 아니, 조금 뻥을 치자면, 머잖아 물고기들의 대화에 참여하는 날이 올는지도 모른다.
어린이집에서 분양받아 온 작은 물고기들. "넌 이름이 뭐니? 너희들이 내게 직접 말해주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