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을 안 한다고 했을 때, 누군가 나한테 경고하듯이 던진 말이었다. 기분이 나빴다. '아니, 내가 안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주면 될 일 아냐? 남이야 하든 말든 그걸 갖고 고집이네 마네 하지?'
일부러 고집을 부리려고 카톡을 거부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지금 눈앞에서 만나는 사람들만으로도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온라인을 타고 인연을 점점 늘려가는 것보다는 이미 맺었던 인연도 슬슬 정리해 가야 하는 시기라고도 생각했다. 굳이 카톡을 하지 않아도 꼭 들어야 할 소식은 들을 수 있을 거고,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질 거라고도 생각했다. 가끔 '단톡방에서 불이 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카톡을 하지 않는 나 자신을 칭찬했다.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지라, 어느 톡방에서든 분란을 일으키는 방화범이 될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내가 결국 2년 전 백기를 들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아들내미의 군 입대 때문이었다. 요즘 군대는 유치원 같다더라, 알림장처럼 소대장이 날마다 훈련 소식을 톡방에 올려준다더라, 전화나 문자는 못해도 아이하고 톡은 할 수 있다더라, 하는 소문을 들었다. 그런 소문을 듣고서 세상의 어느 어미가 카톡을 거부할 수 있단 말이냐.(사실 그것은 헛소문! 훈련 소식을 담은 유치원 알림장은 카톡이 아닌 '밴드'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거의 모든 부고(訃告)를 톡으로만 받을 수 있어서였다. 경사(慶事)는 놓쳐도 애사(哀事)는 챙기자는 마음가짐으로 살았는데 부고를 뒤늦게 알게 되는 일이 반복됐다. 어이쿠, 이러다 사람 구실 못하며 살겠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카톡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디지털 문맹인' 취급을 받았다. 단지 카톡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내 나이 때문일까, 사람들은 내가 디지털에 무척 느릴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사실 그렇지는 않았으니,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중에서도 내가 줄곧 애용해 온 것은 블로그였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다음 포털에서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였을 거다. 블로그는 꽤 오랫동안 내가 글을 써 모아두는 장소였는데, 그 글들이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버릴까 봐 '블로그북'을 따로 만들어 두기도 했다. 얼마 전 블로그 서비스가 종료되어 티스토리로 이전하라고 했을 때는 오랜 단골집이 문을 닫는 듯한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후 어떤 계기로 브런치를 알게 되었다. 블로그처럼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니 묘한 도전심이 생겼더랬다. 내가 글쓰기를 할 만한 사람인지를 알아보는 시험대에 서 보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세 편의 글을 모아 보냈는데 사흘 후 기분 좋은 답신을 받았다. 그것도 2년쯤 전인가 보다.
한동안은 진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바지런히 써서 올렸다. '하루 한 편'을 도전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 가끔은 써 놓은 글을 다시 읽으며 너무 나를 미화한 것 같아 원고지 구겨버리듯 '작가의 서랍' 속에 도로 처박았다. 또 가끔은 '조회수'나 '라이킷'에 눈길을 던지는 나 자신을 보며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이 그것이었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조회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혹은 어쩌다 출간 기회라도 생길까 하여 쓰는 거였나?'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가차없이 브런치의 셔터를 내렸다.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고, 중학교 때 절친이었던 현정이가 짧은 투병을 하다 먼저 하늘로 갔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다.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으면 참석하지 않는 내게도 메일을 꼭꼭 챙겨 보내주었던 현정이. 새로운 친구를 찾았다는 소식도 늘 현정이가 알려주었더랬다. 사오 년 전부터인가 메일이 뜸해졌다. 그러고 나서 코로나가 터졌다. '코로나 때문에 모임을 하지 않겠지, 내가 카톡을 하지 않으니 연락하지 않는 거겠지,' 하고 무심히 넘겼더랬다.
다른 친구를 통해 현정이 소식을 들은 뒤, 카톡을 하지 않은 나를 처음으로 원망했다. 카톡 했더라면 현정이가 아픈 걸 알았을 텐데, 죽기 전에 마지막 인사라도 나눴을 텐데... 저장되어 있던 현정이 번호로 뜬 프로필 사진은 현정이 아이들의 어린 시절 사진이라고 생각했지, 이미 세상 뜬 지 오래되어 현정이 폰이 아닐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연락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과 연락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친구가 살아 있는지, 그 프로필 사진이 내 친구의 것이 맞는지 종종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나이가 되어 버린 거였다.
'옷장에 옷이 너무 많아. 버릴 건 버려야지. 내가 사용하던 물건들, 이거 다 어쩔 거야.'
하느님이 데려가시는 날이 갑자기 온다고 해도, 남은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은 정리를 하고 싶었다. 남길 건 남기고 버릴 건 버리자고. 그것만 잘해 놓아도 가는 발걸음이 좀더 가벼울 거라고. 그런데 나는 그동안 너무 버리는 것에만 치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이 내 인생을 통해 주셨던 이 좋은 경험들은 남겨야 하지 않나? 내게 주신 좋은 생각들은 그냥 날려버리면 안 되지 않나? 내 인생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축복들과 깨달음을 남기지 않는다면 '글쓰기'라는 탈렌트를 땅에 묻어두는 것은 아닌가?' 버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남기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나. 이것도 재능이라면, 주신 재능을 나 혼자만 받아 누리다가 갈 수는 없잖은가. 그러려면 더 부지런히 글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브런치에 진심이 되었다. 브런치에 진심이 되고 나니, 식탁에 올라오는 다른 SNS도 하나씩 둘씩 떠먹어 보는 중이다. 비슷하면서도 매체마다 조금씩 맛이 다르다.
'지은이 프사 바뀌었네. 와, 이번 공연에서 주인공 맡았네. 나이 환갑 다 되어 연극배우라니, 멋있다.'
'경미는 타샤 튜더 같구나. 정원이 너무 멋진걸.'
'영은이 이번에 딸내미 시집보냈구나. 한복이 잘 어울리네.'
'와, 병이는 그 나이에 마라톤 풀코스 완주라니! 대단해.'
'정은 언니는 여전히 글을 잘 쓰는구나. 이렇게 훌륭한 수녀님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카톡으로, 인스타로, 유튜브로. 비록 일대일 채팅이나 방을 만들어 대화를 나누지 않는 일방적인 만남일지라도 다들 어디에선가 잘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울러 나를 아는 누군가도 내 브런치의 글들을 맛보면서, '아따, 종이배, 나름 할매로 잘 삭아가고 있구먼.' 하고 나를 기억해 준다면 브런치를 차리는 수고는 얼마든지 기쁘게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할매 얘기보다는 늬들 얘기를 더 좋아하더라. 늬들 얘기 썼을 때 조회수 떡상! 늬들을 질투하는 건 아니지만 늬들이 더 잘 살고 있나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