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 출판사에서 꽤 오래 일했다. 교회 서적을 내는 곳이었는데, 성인 대상 책만 팔아서는 적자를 면키 어려웠다. 궁여지책으로 어린이책을 만들었다. 책을 잘 읽지 않는 어른들이라도 아이들을 위해서는 지갑을 쉽게 열었으니까. 그때 만든 어린이책들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아이들의 심리는커녕 기본적인 발달도 모르면서, 겉보기에만 그럴싸한 책을 찍어냈다. 보기 좋은 쓰레기, 값비싼 쓰레기를 만든 셈이다.
요즘은 나처럼 어린이책을 대충 만드는 편집자는 없을 게다. 책을 고르는 부모들의 안목이 높아져서 수준이 떨어지는 책을 만들었다가는 제작비도 건지지 못하고 재고로 쌓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려는 목적을 갖고 만든 그림책들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만드는 편집자도, 사주는 부모도 아이들이 책을 통해 자연스럽게 글자를 깨치기를 바라는 마음이리라.
천지인 원리로 만들어진 모음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이제 자음을 알아볼 차례다. 세종대왕은 자음을 발성기관의 모양을 기초로 만드셨다지만, 아이들에게 그런 접근은 쉽지 않다. 답을 모를 때는 벤치마킹을 할 수밖에. 발도르프 교육 내용도 기웃거리고, 시중에 나온 그림책들도 뒤적였다. 아이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물에서 글자 모양을 가져오는 것이 가장 무난한 방법 같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라고 하지만, 기역자를 배우기 위해 낫을 그려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겠나. 그러나 남의 이론을 무조건 가져오는 건 왠지 께름칙하다. 나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의미도 담고 싶다. 모음을 엄마라고 했으니, 자음은 아들이라고 설정하고 이야기를 만들었다.
엄마가 대궐로 가고 난 뒤, 집에 남아 있던 네 아들은 엄마를 돕기 위한 방법을 궁리한다. 자신들도 글자를 만들 수 있는 비밀을 찾아낸다면 엄마를 하루빨리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아들들은 집을 떠난다. 첫째 아들은 바다로 간다. 가는 길에 거위(ㄱ)를 만나고, 지렁이(ㄹ)를 만나고, 콩잎(ㅋ)을 먹는 토끼(ㅌ)를 만난다. 하늘로 날아가는 두루미(ㄷ)도 만난다. 바다의 수평선을 보면서 글자 속에는 '가로선'을 쓴다는 것을 알아낸다. 둘째 아들은 산으로 간다. 역시 가는 길에 문(ㅁ), 나무(ㄴ), 밤(ㅂ), 폭포(ㅍ)를 만나고, 그 친구들로부터 글자를 쓸 수 있는 두 번째 비밀인 '세로선'이 있음을 알게 된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기뻐하며 동생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온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난 뒤에, 넷째 아들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제 넷째 아들 얘기해 줄게."
"어? 셋째 아들 이야기할 차롄데?"
첫째 둘째 이야기를 했으니 당연히 셋째 아들 이야기가 나오려니 했던 아이들이 묻는다.
"그지? 셋째 아들 이야기를 할 차례가 맞는데, 먼저 넷째 아들 이야기부터 해야 할 사정이 있어."
아이들의 눈이 내게로 쏠린다. 소금장수부터 시작된 이야기의 하이라이트요, 클라이맥스가 이제 전개되려는 참이다. 나도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목소리를 낮춘다.
"넷째 아들은 사실... 태어날 때부터 다리를 쓸 수 없는 사람이었어. 자기 혼자서는 걸을 수 없었던 거야."
"왜애~?"
"원래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어딘가 몸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어. 그 집은 넷째가 그랬던 거지."
"불쌍하다...."
몸이 불편하다고 해도, 방 안에서만 지낸다고 해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한 사람'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뭔가 부족하게 보이는 사람도 자기 삶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내 마음대로 만드는 이야기니까.
넷째는 다리를 쓰지 못해 평소에는 엄마와 형들의 도움을 받아 생활했다. 엄마도 떠나고 첫째 둘째 형도 엄마를 도와 떠났으나, 셋째 형은 넷째를 보살펴야 해서 떠나지 못했다. 셋째는 엄마 대신 밭일도 하고, 동생도 보살펴 준다. 넷째는 도움이 못 되는 자신의 처지가 슬프다. 셋째 형이 밭일하는 동안 방에서 사용하라고 넣어주고 간 요강(ㅇ)과 대화를 나누며,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요강은 문에 뚫린 작은 구멍 사이로 밖을 내다보게 하고, 먼 하늘에서 자기를 비춰주는 해님(ㅎ)을 만난다. 그리고 새로 만드는 글자에는 동그라미가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낸다.
넷째 이야기에는 다분히 내 개인적 신앙이 투영되어 있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넷째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진복팔단(眞福八端)은 하늘나라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것이라고 선포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고 절망했던 넷째는 자신의 오물을 받아주는 요강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되고, 더럽고 보잘것없는 존재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하늘의 해님을 보게 해 준다. 네 아들 중에서 넷째가 가장 영성적인 사람이다.
그에 비해 셋째 형은 몸으로 일하고 공동체에 봉사하는 사람이다. 셋째 형은 첫째와 둘째처럼 엄마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으나, 밭일과 넷째를 책임지느라 집에 남는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렇게 자기 몫을 먼저 챙기지 않고 공동의 일을 적극적으로 맡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셋째가 바로 그런 유형이다.
각자 가로선, 세로선, 동그라미라는 비밀을 알아낸 네 형제는 다음날 일찍 엄마를 찾으러 가기로 하고 잠자리에 든다. 셋째는 쉽게 잠을 이룰 수 없다. 밭일을 열심히 하고 동생을 돌봐주었지만, 자기는 비밀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훌쩍거리며 울자 두 형님은 셋째의 마음을 이해한다. 다음날 새벽, 셋째 대신 먼저 일어나 밭일을 하러 나간 첫째와 둘째에게, 지게와 옥수수, 고추는 수수께끼를 낸다. 그들이 낸 수수께끼는 '서로 도와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글자'와 '가끔은 세상을 거꾸로도 보아야 보인다', '함께 살아야 덜 힘들다'는 것이었다. 첫째와 둘째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지만, 셋째는 밭일을 하면서 늘 보아온 지게(ㅈ)와 옥수수(ㅅ)와 고추(ㅊ)가 낸 수수께끼를 풀어서 그들이 품은 글자를 찾아낸다. 셋째가 찾아낸 글자들은 첫째와 둘째 형이 알아낸 가로선과 세로선을 서로 기대 놓음으로써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세 형님은 막내를 지게에 태우고, 엄마를 도우러 임금님이 계신 대궐로 떠난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고 다음번에는 자음과 모음이 만나 글자를 이루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글자를 품고 있는 사물들. 그것들의 이름에도 들어있는, 같은 글자를 찾아본다. 쉽진 않다. 심지어 옥수수는 거꾸로 봐야 보이는 시옷(ㅅ)이다.
'산은 산, 물은 물'
나는 이 말씀의 깊은 뜻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산이라는 모양에서 산의 'ㅅ'이 보이고 물이 흘러가는 모양에서 물이라는 글자의 'ㄹ'이 보인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의 모양과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을 나타내는 글자 모양이나 속성을 느끼곤 한다. 모음이 보이지 않는 천지인을 품고 있다면, 사물에 닿아 있는 자음은 그 사물이 지닌 어떤 특성을 모양 안에 품고 있다고나 할까(내가 이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고 표현력이 부족하여, 이보다 더 자세히 설명하여 쓸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
내가 '사물을 보면 글자가 보인다'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이런 식으로 가르쳐줄 수는 없다. 사물이 글자를 보여줄 때까지 잘 보라고 하면, 가르치라는 글자는 안 가르치고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이들과는 몸으로 자음을 만드는 놀이만 한다. 글자의 모양이 몸에 스며들도록, 머리에 새겨지도록.
"거위가 기역기역 노래를 한다, 걱걱걱 걱걱걱, 이야 이야호~"
"나무가 니은니은 노래를 한다, 난난난 난난난~ 이야 이야호~"
교사가 노래를 부르면서 제시하는 글자를 몸으로 표현해 보는 놀이다. 혼자 하기도 하고, 둘이나 셋이 하나의 글자를 만들어 보기도 한다. 마지막에는 방 전체 아이들이 하나의 글자를 만들어보라고 해본다. 손으로 만들다가, 앉아서 하다가, 눕기도 하고, 다리를 있는 대로 쭉 벌리기도 하고, 고개를 숙여 넣기도 한다. 몸이 유연한 아이들은 생각도 유연해서, 가끔 교사를 깜짝 놀라게 하는 기발한 동작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웃고 떠들며 노는 중에, 우리 글자는 어느새 아이들의 몸 안으로 배어들어간다.
(왼)고개를 숙이면 미음이 되고, 고개를 들면 비읍이 되는 걸 안다. 가획의 원리를 벌써 통달. (가)온몸을 던져 만든 피읖 (오)다리만 벌려도 시옷이 된다. "이건 짱 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