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랑 어머니랑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해서, 자기 또래의 삼촌이나 고모가 있는 아이가 있었다. 흔하지는 않았어도 어릴 적에는 종종 그런 일이 있었다. 결혼하는 나이는 점점 늦어지고, 출산율은 그보다 더 가파르게 떨어지는 인간 사회와는 달리, 우리 동네 냥이들은 개체수를 꾸준히 늘려가고 있다. 엄마와 딸이 거의 같은 시기에 임신을 하면서. 심지어 임신시킨 아비는 얼굴 커다란, 동일한 치즈냥으로 의심되고 있으니, 이런 막장이 있나.
삼색 무늬가 똑같은, 엄마와 딸로 추정되는 두 마리의 암컷 냥이가 한동안 차고와 베란다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조금 더 몸집이 컸던 엄마 삼색이는 배가 불룩해지면서 보이지 않았다. 아직 청소년 티를 다 벗지 못한 것 같은 작은 삼색이에게 영역을 내주고 자기는 출산을 하러 어디론가 간 듯했다. 예쁘장한 얼굴에 마주칠 때마다 가녀린 목소리로 밥 달라고 울어대는 작은 삼색이에게 '쓰리쓰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안돼!!! 제발!!! 이름 지어주지 말라고!!!"
내가 고양이들의 이름을 새로 지어준다고 하면 남편은 펄쩍 뛴다.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구처럼 이름을 지어주는 순간부터 그 녀석들은 동네 길고양이가 아니라 '의미'가 되는 거라고.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그들과 우리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인연의 끈이 생기고 만다고.
'이름은 그저 이름일 뿐이야. 그저 각각의 개체를 식별하기 위한 번호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의미 부여를 하지도 말고, 정을 주지도 않으면 돼.'
그러나 쓰리쓰리,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지 두어 달쯤 지났을 때, 우리는 그녀의 쾌적한 출산을 위해 '산실청'을 차리고 있었다.
"쓰리쓰리가 새끼를 가진 것 같아. 어쩌지?"
나한테 정을 주지 말라던 남편이 조심스레 내게 그녀의 임신 소식을 알려왔다.
남편은 아기고양이가 태어난 이후를 걱정하고 있다. 아깽이들이 조금 자라서 팔랑거리면서 돌아다니게 되면 고양이 개체수보다 많은 동네 아이들이 온갖 추르와 사료를 들고 모여들겠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고양이를 어르고 꼬이고 하는 소리가 들리면, 가뜩이나 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건너편 이웃집의 신경은 더 날카로워지리라. 게다가 천방지축 돌아다니는 아깽이들이 쌩쌩거리는 차도를 물색없이 다니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조용한 전기차 보닛 밑에 숨어 들어가 자던 녀석을 본의 아니게 유괴(?)했던 기억이 있으니, 고양이의 임신과 출산을 마냥 반길 수는 없었다.
"........"
"........"
"그래도..."
"그지, 그래도....."
"새끼는 편히 낳게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마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누가 달 것인가, 하는 문제처럼 서로 말을 꺼내기 어려워했지만, 우리는 베란다에 산실을 마련해 주기로 했다.
햇볕이 강하게 드는 대나무 발 아래로 볕을 차단해 줄 부직포를 댔다. 빛이 덜 들어오니 한결 선선하다. 안 쓰던 빨래바구니를 옆으로 뉘고 안에는 그녀가 자신의 체취를 발라놓은 스크래처를 놓았다. 남편은 순산을 응원하며 자기의 순면 속옷도 하나 기부했다. 예상과 달리 쓰리쓰리는 처음 이틀 동안은 빨래바구니 위를 자근자근 밟고 다녔다. 그러다 사흘째 되던 날 저녁, 쓰리쓰리는 드디어 바구니 안으로 파고 들어가더니, 그날 밤 첫 출산을 했다.
새벽녘, 베란다에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출산이 다 끝나지 않았나 보다, 생각하며 기다렸다. 날이 밝아 열어보니, 고양이가 아기 쥐를 낳았구나!! 실험실의 모르모트처럼 하얗고 작은 물체가 바구니 밖에서 울고 있었다. 새끼가 아무리 찡얼거려도 쓰리쓰리는 바구니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다른 새끼들이 있는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아이고, 어째. 쟤는 죽으려나 봐. 엄마가 포기했으니 안 데리고 들어가는 거겠지?"
한참을 기다려도 쓰리쓰리는 새끼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다. 새끼도 거의 탈진한 것처럼 보였다.
"죽은 것 같아."
"그럼 치워야지."
밤새 산고를 겪은 그녀를 참치로 꼬여낸 뒤, 남편은 시체수습을 준비했다. 그런데, 아기가 꼬물거린다! 아직 숨이 붙어있다.
"여보! 쟤 살아 있어!"
내가 큰소리로 남편에게 말했다.
"음... 여보, 그런데 말이야, 가끔 유튜브 보면 새끼들 구조해서 치료해 주고 그런 것 나오기는 하는데, 그거 진짜 어려운 거야."
남편은 내가 새끼를 구조해서 살리자고 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까지 자비심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다. 야생동물의 운명을 사람이 모두 책임지려고 하는 건 어쩌면 인간의 오만일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게다가 나는 그녀에게 절대로 정을 주지는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 아닌가! 그저 이름만 붙였을 뿐, 출산만 도와주자고 했을 뿐이다. 그녀의 새끼를 책임질 만큼 나는 휴머니즘, 아니 냥머니즘 가득한 사람이 아니다.
시체를 수습하려던 남편은 새끼를 살짝 들어다 바구니 안으로 넣어주었다. 남편이 보니 쓰리쓰리가 낳고 난 뒤 핥아주지도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쓰리쓰리가 첫 출산이라 뭘 몰라 그러나?"
"그러게 말이야. 저게 너무 어려서 엄마가 됐나 봐. 저 녀석 어디 엄마 노릇이나 제대로 하겠어?"
마치 '고딩 엄빠' 대하듯 쯧쯧거리며 남편의 말에 동조했다.
먼저 출산을 하고 돌아온 엄마 삼색이는 살이 쪽 빠져서 쓰리쓰리랑 몸매가 비슷해졌다. 누가 엄마고 누가 딸이냐.
죽은 줄 알았던 쓰리쓰리의 새끼 한 마리. 다행히 잘 살아남았다.
*
출산 후 한껏 예민해진 쓰리쓰리는 하루종일 빨래바구니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밥 주는 남편에게도 하악질을 하며 방망이를 날린다. 고생했으니 참치도 주고, 특식도 주려는데 문 여는 소리만 들려도 으르렁댄다. 문 밖에서만 살짝 볼 수 있어서 바구니 안에 새끼가 몇 마리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오늘도 쓰리쓰리는 새끼들을 품고 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에도,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에도 한시도 아기들 곁을 떠나지 않는다. 너무 더우면 베란다 찬바닥에 몸을 식힌다. 새끼들은 아직 눈도 뜨지 못했으면서 가끔 품을 벗어나 헤매고 다닌다. 그녀는 바구니 밖으로 기어나간 새끼들이 자기를 찾아오기를 그윽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기다린다.
새끼들 해코지할 사람은 아니라는 신뢰를 받게 될 때까지는 베란다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수도 없다.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닌데도 그녀의 모성에 살짝 감동한다. 그러다 뜬금없이 떠오르는 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