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출산을 동의어로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결혼을 하면 저절로 아기가 생기는 거라고, 아기를 낳고 싶으면 먼저 결혼을 해야 하는 거라고 알고 있던 때. 무지몽매하던 어린 시절 얘기다.
"네 언니는 한강다리 밑에서, 너는 부산 영도다리 밑에서 주워왔지."
설령 주워왔다고 해도 왜 다리 밑에서 주워왔는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묻지는 않았다. 엄마가 우리를 주워왔다는 다리가 강을 건너는 그 다리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큰 뒤였다. 순진했던 건지, 모자랐던 건지. 옛날 같았으면 시집가서 애를 낳았을 나이라고 했던 여고시절에도 나는 결혼과 임신, 출산의 메커니즘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까진' 친구들의 음담패설이 결혼과 출산에 관해 들을 수 있는 정통한 소식통이었을 뿐.
친구들에 비해 십 년은 늦은 결혼이었다. 가까운 친구들은 이미 다들 결혼을 했고 아이를 한둘은 낳아 키우고 있었으니, 결혼과 출산을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출산은 하였으나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도 내 주변에는 없었다. 결혼을 한 사람에게는 아이가 있었고,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모두 결혼한 부모 중 하나였다.
가까운 지인 중에 난임으로 고통받았던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결혼과 출산을 동일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엔 그 부부만이 겪는, 매우 희귀한 사례라고 여겼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아기를 원하지만 아기가 생기지 않는 난임부부, 혹은 아예 임신이 불가능한 불임부부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팬데믹을 겪으며 그간 당연히 누리던 것들에 대해 다시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었듯이, 난임부부들은 당연한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당연한 것들, 이라고 받아들이던 것이 실은 특별한 것들, 고귀한 것들, 선사받은 것들이었다. 결혼도, 임신도, 출산도, 그리고 양육도.
수컷이라 출산의 경험은 없지만, 임신시킬 가능성도 빼앗겨 버린 막내 고양이가 요즘 날마다 문 너머로 쓰리쓰리가 낳은 아기고양이들을 구경한다. 막내가 워낙 친화력이 좋은 녀석이라 그런지, 쓰리쓰리도 자기네 식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막내에게 경계심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사람 집사는 밥을 주러 나가도 하악거리면서 막내한테는 너그럽다.
막내는 길에서 구조된 녀석이고, 우리는 그 녀석의 건강을 위해 수술을 시켰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부분과 감당할 수 없는 부분만 생각했다. 우리가 데리고 살면서 그 녀석들 각자의 생존과 건강만 염두에 두자고 했다. 냥이의 출산권이나 동물권 등을 윤리적, 도덕적으로 따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결정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에 우리가 네 번째 냥이를 들인다고 해도 아마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런데도, 막내가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걸 보니, 왠지 가여운 마음이 든다. 난임부부, 불임부부가 남의 집 아이를 바라볼 때 들었을 헛헛한 마음을 그 녀석도 느끼는 것은 아닐지, 괜한 걱정을 하면서.
동물의 세계에서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없으니 새끼를 낳고 기르는 출산과 양육만 본능적으로 해낼 테다. 어쩌면 앞으로 맞이하게 될 양육이라는 길고 험난한 과정을 알지 못하고 있어서, 출산하여 대를 잇는 본능에만 충실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쓰리쓰리도 지금은 안전한 베란다에서 주는 밥 얻어먹으며 살고 있지만, 호시탐탐 영역을 노리는 다른 고양이들에게 밀려날 수도 있다. 새끼들은 '냥줍'이라는 말로 유괴해 갈 사람들 틈에 노출되어 있고. 새끼까지 보호해야 하니 어미로서 살아갈 그녀의 앞길은 어떠려나.
집 밖에서 본능대로 출산하며 사는 쓰리쓰리나, 집 안에서 본능을 거세당한 채 사는 막내나, 묘생살이가 그리 녹록지는 않다. 이 녀석도 저 녀석도 다 짠하고 안쓰럽구나.
막내는 하루에 많은 시간을 문 앞에 앉아서 아기고양이와 어미를 구경하며 지낸다. 집에서 산다고 해도, 집 밖에서 산다고 해도 어느 하나 녹록지 않은 묘생살이.해산한 지 이주일 가까이 되어 가니, 쓰리쓰리도 산후통에서 조금 나아졌나 보다. 축 늘어져 있으면서도 한시도 새끼들 곁을 떠나려 하지 않던 녀석이 어제오늘은 살짝 마실을 나갔다 오기도 한다. 벌써 이소를 준비하는 걸까? 아니면 마음 편하게 화장실에라도 다녀오는 걸까? 엄마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살그머니 나가서 아기고양이들을 구경한다.
보슬보슬한 털들도, 탁구공처럼 동그랗고 하얀 머리도, 분홍 발바닥도 만져보고 싶지만, 사람 냄새가 밸까 봐 눈으로만 보고 들어온다. 남편과 나는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서로 보여준다.
오늘 아침에는 새끼들 이름도 지어주었다.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녀석들이지만, 생명의 탄생은 언제나 경이롭고, 아기들의 귀여움은 동물이라고 다르지 않으니, 이름이라도 신명 나게 불러주리라는 마음으로.
"여보! 쓰리쓰리 새끼들 이름 지었어. 똑같이 생긴 흰 녀석 중에 큰 놈은 '아리랑', 작은놈은 '쓰리랑', 그리고 엄마랑 똑같이 삼색이는 '아라리요'야."
아리랑 쓰리랑 아라리요~~~ 덩실덩실 춤을 추며 이 녀석들의 무사한 성장을 축원하는 아침이다.
보고 또 보고, 하루종일 보고 싶은 아기고양이들. 심쿵!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