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는 얘네들한테 '엄마'라고 하는데, 당신은 얘네들한테 '아저씨'라고 하면, 우린 뭐지? 불륜인가?"
남편이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면서 "얘들아, 배고프지? 아저씨가 밥 줄게."라고 했을 때 내가 남편에게 따져 물었던 말이다. 남편이 고양이들에게 자신을 지칭하는 말은 이렇게 일관성이 없다. 어떤 때는 아빠라고 했다가, 또 어떤 때는 아저씨라고 했다가.
내가 그들에게 '엄마'라는 호칭을 허락하기까지는 내적 갈등을 오래 겪었다. 아무리 인간이 동물이라고 하지만 개한테, 고양이한테, 토끼한테, 심지어 햄스터나 달팽이한테 엄마라니.
엄마가 되기 위해 나는 내 몸 가장 깊숙한 곳에 둥지를 만들어 열 달 동안 제공했고,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산통을 겪었고, 산통보다 더 아픈 젖몸살을 겪었다. 그뿐인가?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아이를 얼러가면서 "엄마 해 봐, 어엄~~~~마!"라고 가르쳤던가. 반복 또 반복한 끝에 드디어 아이가 그 작은 입으로 "아암마!"라는 말을 했을 때 느꼈던 그 감격스러움이란!
그런데 아무리 가르치고 기다린단들, 엄마는커녕 나를 알아보기나 할까 싶은 고양이들에게 엄마라는 그 귀한 호칭을 허락하다니.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게다가 반려동물에게 옷을 사 입히고, 유모차에 태우고, '우리 아기'라고 하면서 우쭈쭈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약간의 경멸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런 내가 고양이들의 엄마를 자처하는 날이 올 줄이야.
고양이가 가족이냐, 아니냐.
호칭을 엄마라고 해버린 것은 그네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조건들, 즉 내가 그들의 엄마가 되기 위해 했던 것들은 아무것도 없더라도 그저 함께 살게 되었으니 가족이고, 가족이 된 이상 호칭 정리는 확실히 하자는 뜻에서였다.
반려동물을 들일 때 보편적으로 '입양'한다는 말을 쓴다. 임신, 출산, 수유의 과정이 없어도 가족이 될 수 있고, 자식으로 받아들여 양육을 하니까 입양이라는 단어를 쓰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반려동물을 들이면서 입양한다는 말을 쓰기 싫었다. 반려동물을 자녀'처럼' 키울 수는 있어도 엄밀하게 말하면 자녀는 아니지 않은가. 사람에게 입양이라는 말은 자녀처럼 키우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자녀다. 입양한 자녀 역시 임신, 출산, 수유를 했던 자녀와 1도 다르지 않은, 똑같은 자녀다. 사람은, 자녀처럼 키우자고 입양하지 않는다.
입양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싫은 것처럼 '분양'이라는 말도 내키지 않는다. 크거나 작거나, 길에 버려져 있다가 만났거나 집에서 키우던 녀석이 출산을 했거나, 그 과정이야 어떻든 하나의 동물은 하나의 생명을 받고 태어난다. 분양이라는 말에서는, 돈만 있으면 마음껏 양산해서 기호에 따라 골라 사갈 수 있다는 냄새가 난다. 생명체가 아파트도 아니고 분양은 무슨 분양.
그래선가, 반려동물을 기르고 싶다고 졸랐더니 시험 잘 보면 사주기로 했다고 약속을 받았다거나, 펫샵에서 데려왔다가 며칠 지내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 바꿔왔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불편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 나를 무슨 까칠한 언어학자나 상업주의에 맞서 싸우는 진보적 생태주의자로 생각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속사정을 보면 그렇지는 않다. 단지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이 고양이들이 가족이냐, 아니냐, 그것을 궁금해하면서 사는 일개 집사(엄밀히 말하면 집사 남편을 둔 보조 집사)일 뿐.
때로 나는 자녀보다 더 애틋한 사랑을 그들에게 준다. 그럴 땐 가족이 맞다.
책을 읽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슬그머니 옆에 와서 자는 고양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고양이들은 특유의 갸르르릉 소리를 내고, 나 역시 그 소리를 들으면 행복해진다. 그들에게 사랑을 구걸한다. 내 아이들을 쓰다듬거나 끌어안아 본 지는 오래됐으면서, 나를 피해 숨는 고양이를 기어코 데려와 끌어안기도 한다. 손주를 안으면 이런 기분이겠지,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이렇게 고양이들에 대한 사랑이 몽글몽글 솟아날 때보다 아닐 때가 더 많다. 그럴 땐 가족이 아니다. 자녀처럼 키우지도 않는다. 내 아이가 똥을 쌌을 때 나는 혼내지 않았다. 그러나 막내 고양이가 내가 외출한 동안 내 방석 위에 똥을 싸고 발로 밟아 온 방안에 묻혀 놓았을 때, 나는 집이 떠나가라 막내를 야단쳤다.
사료 주문 담당인 남편이 사료를 중저가 위주로 주문할 때 나는 모른척한다. 남편이 고양이 장난감이라고 이것저것 사 와서는 "이거 전부 싼 것들이야." 하면서 내놓을 때, 나는 쓸데없는 곳에 돈을 썼다고 눈을 흘긴다. 내 아이들한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음식은 비싸도 유기농을 고집했고, 장난감 사주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가족이라고 하기에는, 차별을 심하게 한다.
아들내미가 군대에 가고 나서는 눈에 군복 입은 자들만 보였다. 고양이들과 살고 나서는 길에서 고양이만 보인다. 휴대폰으로 몇 번 고양이를 검색했더니 유튜브 알고리즘은 꼬리 물듯이 고양이 관련 영상을 제공한다. 고양이 사진을 기가 막히게 찍는 작가님의 브런치는 날마다 찾아가는 '성지'가 됐다.
엄친아, 엄친딸처럼 유튜브 영상에 올라오는 고양이들은 어찌나 다들 재주가 많고, 잘 생겼는지. 예쁘고 귀여운 것들이 재롱을 떠는 영상을 보고 난 뒤에 우리 집 냥이들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너는 정녕 저렇게 생길 수는 없었느냐?'라고. 이렇게 대놓고 외모 비교를 하는 일도 우리 아이들한테는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이다. 내 자식 사진을 찍어 보고 또 보고 했지, 남의 자식 재롱을 그렇게 웃으면서 즐긴 일도 없다. 이럴 땐 가족이 아니다. 냥이들 입장에서는 '엄마가 아니라, 웬수여.'라고 할지도 모른다.
'이 구역의 미친놈'인 두 번째 고양이 메이가 힘없는 막내 고양이를 향해 발톱을 세우고 털을 뽑을 때면, "메이, 네 이놈! 너 자꾸 그러면 갖다 버린다!!!"라는 험한 말까지 쏟아낸다. 이런 말을 자녀한테 했다면 감옥 갈 일이겠다. 그런데 방구석 여포인 메이가 정원의 작은 벌레를 무서워하면서 기어 다닐 때는 얼른 들어오라고 문을 열어준다. 겁에 질린 메이가 뛰어들어오면 그 녀석을 받아들여 주는 건 우리들이니, 보호자로서 울타리가 되어 주는 우리는 영락없는 부모다.
얼마 전부터 베란다 뒤에서 동네 냥이들이 싸우는 소리가 종종 들린다. 다쳐서 오는 녀석들도 있고, 사람이 지나가고 있어도 서로 꼬리를 한껏 키우고 대치하는 모습도 본다. 우리 집 베란다를 두고 다시 영역 싸움이 일어나는 것 같다. 한동안 '엄마삼색이'와 '작은삼색이'가 자주 어울려 다녔는데, 요 며칠 '엄마삼색이'가 보이지 않는다. 동네 길냥이다 보니 안 보이다가도 나타나고, 나타났다가도 홀연히 사라지곤 한다. 어디서 밥은 얻어먹고 다니는지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사실 '엄마삼색이'가 '작은삼색이'의 엄마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 그저 무늬가 닮았고, 크기가 달라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뿐이다. 젖소, 발랄이, 깻잎이, 코점이, 얼큰이, 멀거니. 눈에 보일 때마다 이름을 붙여 부르고, 이름을 지어주고 나면 밥을 챙겨주고, 겨울에는 박스를 놓아주고.
"몰라. 어떻게 다 거둬. 그냥 오는 녀석들만 밥 줘."
"그래도 또 새끼 낳으면 어떻게 해. 꾀어서 병원 데려가야지."
"아이고, 또 싸우고 다니냐. 너희들 어쩌면 좋냐."
"이제 더는 안 돼! 절대로! 셋이면 충~~~분하다고!"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도 모르면서 엄마와 아빠는 이런 말들을 나눈다. 가족 같으면서도 가족 아닌, 가족이 아니면서도 가족인 그런 관계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중이다. 집냥이들과도, 길냥이들과도.
"넌 또 어디에서 다쳐온 거냐? 맞고 다니지는 마라." 코점이 며칠 안 보이더니 눈가에 상처가 나서 왔다. 걱정이 되는 건 가족 같아서지만, 가족이 아니라 병원까지는 안 데려간다.
동생을 괴롭혀서 엄마한테 혼난 메이. 혼내고 나니 안쓰러워서 내가 쓰던 책베개를 내어줬더니, 그걸 베고 콜콜 잠이 들었다. 이러니 어찌 미워할 수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