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쿠션, 오늘 엄마가 쓴다? 괜찮아?" "엄마! 나 오늘 엄마 패딩 입고 나가도 돼?"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집에 있는 거의 모든 물건을 공유하고 있는 가족들이라도 사용하기 전에는 서로 허락을 구한다. 내가 그걸 써도 되는지, 그가 행여나 아끼는 것을 내가 손대는 것은 아닌지.
그런데 '그들'은 그런 게 없다. 내가 큰맘 먹고 산 목화솜 방석도 내 허락 없이 차지하고, 공들여 떠서 만든 무릎 담요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다. 주인인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슬그머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자연스럽다 못해 천연덕스럽다. 그들은 내 눈치를 보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가감 없이 브런치에 쓴다. 우리 집 고양이들 이야기다.
오늘은 그중에서 '메이'를 들여다본다. 세 마리 중에서 가장 못 생겼고, 세 마리 중에서 가장 야단을 많이 맞는 녀석이다. 묘생 7년 차 수컷, 치즈냥.
내가 다녔던 어린이집에는 '햇볕마당'이라고 부르는 테라스가 있었다. 지붕이나 문이 없어서 동네 길냥이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우리 어린이집이 생태교육을 하는 곳이었고, 어린이집 안쪽 마당에는 토끼장을 만들어 토끼도 키우고 있었기에 동네 고양이들의 출입을 통제할 마음은 없었다. 고양이들은 주로 밤에 드나들어서, 아침에 출근하면 뜯다 만 족발 뼈다귀, 치킨 뼈다귀가 남아 있었다. 그런 것까지는 봐줄 만했는데, 머리가 없어진 채 남아 있는 참새와 까치 시체를 본 뒤에는 특단의 조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특단의 조처를 하고 싶었다.
"고양이들이 타고 올라오지 못하게 아크릴 판으로 구멍을 막아보면 어때요?"
아크릴판을 주문해서 막았다. 하지만 아예 문을 달아 막지 않는 한, 고양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때 어떤 선생님이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호랑이 울음소리를 다운받아서 반복 재생시켰다. 그러나 밤새도록 틀어놓을 수도 없었다. 고양이를 쫓으려다 민원 때문에 우리가 쫓겨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호랑이 울음소리로 고양이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이는 코로나 발생 초기에 양파즙을 먹으면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다고 했던 것과 비슷한 수준의 가짜 정보가 아닐 수 없다.
고양이가 햇볕마당에 드나드는 것을 막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조용한 시간이나 밤에만 들락거리면 문제가 없는데, 모둠 시간이든 체조 시간이든 식사 시간이든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기도 했다. 아이들은 고양이를 구경하고, 고양이는 아이들을 구경하면서 서로의 영역을 조금씩 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익숙해지니 고양이들은 예의 그 천연덕스러움으로 우리 어린이집을 차지했다.
해마다 3월 중순이면 햇볕마당에 있는 모든 짐을 들어낸 다음, 물을 뿌려 봄맞이 대청소를 한다. 나는 몰랐다, 그즈음 이미 고양이들은 자신들의 봄을 맞았고, 수태를 했고, 출산을 했고, 꼬물꼬물 한 어린것들을 키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아아악! 새끼 고양이야!"
물청소를 하려고 교구장을 들어내면 서너 마리의 새끼 고양이들이 서로 얽혀 있었다. 어린것들도 어린것들을 좋아한다. 조용히 지켜보자고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금방 어미에게 발각당한다. 어미는 그다음 날이면 바로 새끼들을 모두 데리고 떠났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자기들을 해치지 않을 거라 알고 있는지, 혹은 그 장소가 동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는지, 동네 길냥이들은 해마다 그곳에서 새끼를 낳았다.
계절이 지나가면서 고양이들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네 마리였다가, 세 마리였다가, 두 마리가 되고. 또 그 작은 냥이들이 커서 엄마를 따라다니고, 엄마가 보이지 않고, 새끼도 더는 새끼가 아니고. 그러는 동안 햇볕마당 안쪽에서 자라던 아이들도 커서 졸업을 하고, 어린이집을 떠나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고양이와 별로 친하지 않았다. 큰길 따라서 한참 가야 하는 텃밭을 임대했다. 아이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텃밭에 갔다. 그날, 텃밭 가는 길에 커다란 고양이가 죽어 있었다. 로드킬을 당한 것은 아니었는지, 다행히 겉모습은 멀쩡해 보였다.
"죽었어. 불쌍해."
"어떡하지?"
"너무 징그러. 무서워."
"죽은 것 여기 두면 안 되는데."
"우리가 묻어줄까?"
고양이를 둘러싼 아이들의 눈에 안쓰러움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어떡하지? 이따가 돌아올 때도 이 길로 와야 하는데.'
아이들이 또 보지 않게 하려면 고양이 시체를 어딘가로 치워야 했다.
그렇다고 아이들과 함께 묻어줄 수도 없었다.
텃밭에 갔다. 동행했던 다른 교사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텃밭 한편에 있던 양동이와 호미를 들고 나섰다. 그리고 고양이 시체를 양동이에 넣고, 텃밭 뒤 야산으로 올라갔다. 호미로 땅을 파고 고양이 시체를 묻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고양이 시체는 너무 무겁고 딱딱했고, 호미로 땅을 파는 건 너무 힘들었다. 왠지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서둘러 땅을 파는데, 마치 내가 살인범이 되어 사람의 시신을 유기하는 것 같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다 이렇게 길에서 객사했는지 모르지만, 고양이들에게도 천국이 있다면 거기 가서는 잘 살길. 그리고 나 오늘 무척 용기를 낸 거니까, 그건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두어 달 후, 다시 햇볕마당 교구장 뒤에서 초록색 눈과 황금빛 털을 가진 뽀시래기, 메이를 만났다. 사람의 손을 처음 탄, 내 품에 안긴 가장 작은 고양이였다.
요랬다. 요 모습에 어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으리요.
'냥줍'이 아니라, 유괴였다. 집에 데려오는 게 이 아이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내 손을 탔기 때문에 어미에게 발각되는 즉시 이 아이는 떠날 것 같았다. 어찌어찌 자란다고 해도 이 아이의 최후는 최소한 객사, 아사, 또는 로드킬. 주저하는 남편에게 사진을 보내주며 꼬여서 데리고 왔다. 동물병원에 가서 수컷임을 알았다. 의사에게는 주워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사람이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원래 키우고 있던 '가을이'와 합방을 하는 데까지는 공을 많이 들였다. 가을이도 처음에는 그루밍을 해주는 등 자기 새끼처럼 살갑게 대했다. 그런데 메이가 커가면서 행패 부리는 일이 잦아서인지, 가을이는 점점 메이를 멀리하게 되었다. 지금도 가을이는 메이를 무척 싫어한다. 메이가 아무 짓을 하지 않아도 하앍, 그냥 옆에만 지나가도 하앍.
크면서 정우성 같던 외모는 개그맨 같아졌다. 코에는 점이 여러 개 생겼다. 줄무늬일 줄 알았던 몸의 무늬도 알고 보니 점박이였다. 속이지 않았으나 속은 느낌. 환형공포증이 있는 나는 처음에 메이 몸의 노란 점들을 보면서 어찌나 징그러운지 소름이 돋곤 했다. 못 생긴 녀석이 눈치까지 없었다. 자기가 좋을 때면 내가 자는 이불 위로 올라와 내 얼굴을 밟고 다니면서 애정 표현을 했다. 까끌까끌한 혓바닥의 느낌도 별로였는데 자꾸만 핥아댔다. 게다가 식탐은 어찌나 부리는지.
유기묘였던 막내 고양이가 집에 들어온 뒤 메이는 막내를 쥐 잡듯 잡곤 했다. 메이의 공격을 받은 막내의 뽑힌 털들이 닭털처럼 집안에 굴러다녔다. 그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식구들은 "메이!!!" 하며 큰 소리로 야단을 치곤 한다. 동네 깡패처럼 구는 메이에게 당하고 세탁기 뒤로 가서 숨는 막내를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더 호되게 메이를 야단친다. 어쩌면 메이는 가을이나 막내와 놀고 싶어 그러는 건지도 모르는데, 놀자고 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소통하는 방식을 모른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것은 생각해 보면 내 탓이다. 엄마 곁에 살면서 고양이가 고양이답게 살아가는 법이 뭔지 더 잘 배웠어야 했는데, 내가 그 기회를 빼앗은 거다. 그게 지금까지도 메이에게 미안하다.
메이를 대하는 이 모든 마음의 밑바닥에는 '가엾음'이 있다. 내 눈에 띄지 않아 엄마와 살았으면 묘생 7년 차가 되도록 살아남을 수나 있었을까. 메이는 그저 고양이로서 고양이의 본성에 충실한 것뿐인데, 마치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기대당하는 건 아닐까. 가을이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미모로, 막내는 타고난 귀여움과 애교로 사랑받고 있지만, 메이는 그런 것도 없으니. 천덕꾸러기 대접을 하려고 데려온 것은 아니었는데, 가을이나 막내에 밀려 사랑받지 못하는 우리 메이.
가엾다.
메이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잘 생긴 고양이만 대접받는 이 더러운 세상!'
하지만 메이야, 어쩌면 사람이 동물을 귀여워하는 것보다 더 귀한 감정은 '가엾어하는' 것일는지도 몰라. 우리 사람들도 하느님한테 이렇게 기도하거든. 우리를 귀여워해주소서,가 아니라, 우리를 가엾이 여겨 달라고. 네가 가엾기에 나는 오늘도 너에게 내 귀한 목화솜 방석을 양보하는 것이고.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길. 원래 묘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니.
왠지 쓸쓸해 보이는 메이. 메이야, 힘내! 밖에는 너보다 더 못생긴 치즈냥이 있단다.
밖에 사는 길냥이 두 마리. 둘이 꼭 붙어 다니는 '멀거니'와 '삼색이'. 메이보다 못생긴 멀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