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사생활

- 님을 봐도 뽕은 못 따게

by 글방구리

"냐아아아 앙~ 으냐아아앙~~"

아기 우는 소리와 너무 비슷해서 소름 끼쳤다. 여우나 늑대가 우는 것처럼 공포심을 주는 것도 아니고, 가늘지만 길게, 흐느끼듯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찢어지게 소리를 지르는 고양이 울음소리. 정말 싫었다. 그런데 그것이 짝을 찾고 싶은, 아니 종족을 번식해야 하는 소명을 이루려 하는 간절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발정 난 암고양이들'이라는 다소 난잡해 보이는 표현과는 달리, 그네들에게는 그네들대로 이 지구상에 온 이상 종족을 이어야만 했던 거룩한 울부짖음이었다. 사람들은 간혹 종족 번식이라는 목적 외의 쾌락을 위해 짝짓기를 하지만, 동물들에게는 쾌락만을 위한 짝짓기는 없다. 그래서 그 울부짖음이 쾌락을 향한 욕구가 아니라, 아파서 내는 소리라고 했다. 자기 사명을 다하기 위해 아파서 지르는 울음이라니.


처음에는 가을이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겠다고 했다. 아들내미가 번쩍 안아온 가을이지만, 기왕에 우리 집에 들어와 가족처럼 지내게 된 이상, 가을이의 생식 기능을 없앤다는 것은 너무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을이가 묘한 울음소리를 내며 벽지를 박박 뜯어도 그냥 두었다. 우리 집 이사날짜가 꼬이는 바람에 몇 달 동안 좁은 원룸에서 월세살이를 해야 했을 때쯤 가을이는 유난히 더 울었다. 그때 아무 민원도 제기하지 않아 준 이웃들에게 감사한다. 민원은 자기 집일 때 더 많이 발생한다. 얼굴을 서로 마주치지 않아도 똑같이 월세 사는 입장에서 그 정도의 불편은 서로 감내해 준다. 없이 사는 사람이 더 넉넉하다.

그런데 가을이의 울부짖음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엄마가 되고 싶은 게다. 엄마가 되고 싶어 하는 가을이의 욕구가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었음을 알고 난 뒤 병원에 데려갔다. 사람들 마음대로 생식욕구를 거세하는 것이 아니라, 가을이가 두고두고 겪어야 하는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첫 냥이인 가을이의 거세는 오랜 고민 끝에 이루어졌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메이와 막내의 경우는 고민을 하지 않았다. 수컷이었던 두 녀석은 적당한 나이가 되었을 때, 당연한 과정처럼 병원에 가서 방울을 떼고 왔다. 방울이 없어진 메이와 막내의 뒷모습을 보는데, 왠지 내가 살짝 민망해지는 느낌도 들었고.


집에서 사는 세 마리는 이렇게 순차적으로 병원을 다녀오는 과정을 겪었으나, 문제는 밖에 사는 녀석들이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사생활. '똥꼬 발랄'했던 발랄이가 네 마리를 낳고 난 뒤, 때마다 순풍순풍 새끼를 낳는 '젖소'로 인해 우리 집 주변에는 고만고만한 새끼 고양이들이 자꾸만 늘어났다. 문제는, 우리처럼 길고양이들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지만은 않는, 그런 이웃들이 근처에 살고 있다는 거였다. 아침저녁으로 사료를 채워주는 캣맘도 있지만, 같은 밥그릇 안에 커터칼 칼날을 넣어두거나, 쥐덫을 놓는 일도 있었다. "고양이 밥 주지 마세요."라고 써놓는 경고문과 함께.

그런 상황에서 고양이들의 개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가끔은 밥 주다가 정든 고양이를 지켜보다가 입양해 가는 마음 고운 아이들도 있었으나, 그렇게 사람들에게 간택되어 가는 수보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영역 싸움을 하는 고양이들의 수가 더 많았으니.

우리 집 베란다에서 태어나 명실공히 동네를 주름잡는 대장 고양이가 된 '깻잎이'는 며칠 안 보이는 사이에 방울이 사라졌다. 워낙 아이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녀석이라 이 녀석의 뒤를 봐주는 동네 분들이 여럿 있다. 깻잎이의 이모뻘 되는 '젖소'는 동네에 몇 안 되는 암컷이라, 때만 되면 수컷들이 졸졸 따라다녔다. 자주 출산을 하기도 해서 요주의 인물이 된 이 녀석은 남편 손에 이끌려 병원에 다녀왔다. 최근 들어서는 못 생긴 '멀거니'와 짝이 되어 다니는 '삼색이'가 불안하다. 멀거니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수컷들이 자꾸 눈독을 들이는 것 같다. 남편은 삼색이를 꼬여서 병원에 데려가려고 때만 노리는 중이다.


환갑이 다 된 나는 오십 대 초반쯤 갱년기를 맞고 폐경이 되었다. 예전에는 '폐경'을 말하는 단어는 남부끄러워 이렇게 공개된 글에 올리지 못하는 것인 줄만 알았다. 이 세상의 반은 여자, 그 여자라면 누구나 수십 년 동안 해야 하는 월경인데도, 월경 자체를 부끄러운 걸로 알았다. 세상이 달라져서 지금은 소녀들이 초경을 경험하면 이제 어른이 되어 간다고 축하를 해준다. 초경파티 같은 것도 있다. 초경은 뭔가 확실하게 드러나지만, 소년들이 겪는 몽정이라는 경험은 어쩌면 더 내밀하게 치러지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임신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살았다. 폐경을 하고 나니 이제 더는 '엄마'가 될 일은 없다. 종족 번식을 하고 싶으면, 이제 내 아이들이 아이들을 낳아야 한다.

"임신 기간 동안 딱 하나 좋은 거 있잖아. 월경 안 하는 거!"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친구들은 이 말에 대부분 동의한다.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은 간혹 목숨을 담보로 할 만큼 고통스럽고 괴로운 경험이다. 그러나 그런 괴로움 속에서도 잠시 월경을 잊을 수 있는 기쁨이 있다. 고양이들처럼 대놓고 소리를 지르지는 않아도 새끼를 낳아 키우는 동안 겪어야 하는 어미의 고통을 수컷이 어찌 알리. 물론, 그렇게 얻은 자식이 너무 예뻐서, 임신과 출산의 과정은 빛의 속도로 잊어버리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얼마 전, 글쓰기 교실에서 시현이가 '닭들의 사생활'이라는 글을 쓰겠다고 했다. 시현이는 워낙 동물에 관심이 많은 친구다. 말도 곱게 하는 시현이는 외모만큼이나 마음씨도 곱다. 남자아이들의 등짝을 스매싱할 때는 대단한 힘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겉으로 보아서는 춘향이 버금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얌전해 보이는 스타일. 그런 시현이가 '닭들의 사생활' 그것도 '번식기'에 대해 쓰겠다고 해서 얼마나 의외였는지.


"수탉이 미워"

닭들은 번식기가 있다. 번식기에는 수탉이 암탉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암탉에게 달려들어 등에 업혀 버티려고 안간힘을 쓴다. 암컷의 털이 뽑힐 것 같았다. 나는 ‘암탉 머리가 아프겠구나.’ 했다. 암탉이 싫어하는 것 같은데, 계속 올라타는 수탉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본능이라니 어쩔 수가 없다. 수컷이 암컷의 깃이나 목 주변의 털을 부리로 잡는데 진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는 것 같다. 나라면 수컷에게 복수할 것이다.

시현이가 쓴 글을 읽고 그야말로 빵 터졌다. 아이의 눈으로 본 닭들의 세계가 이랬구나. 그래도 '본능이라니 어쩔 수가 없'다는 시현이는 동물들의 욕구와 본능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진 따뜻한 아이였다.

그에 비해 나는 우리 집 냥이들의 사생활을 브런치에 까발려 글을 쓴다. 얘네들은 이제 더는 종족을 이어가지 못할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하지만 그게 최선이었어요,라고 쓴다. 내가 자신들의 사생활을 이렇게 쓰는 줄도 모르고 오늘도 해맑게 뛰어다닌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아담과 하와처럼, 방울이 떨어진 생식기를 다 내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너 요새 따라다니는 놈들 많더라. 너도 곧 병원에 다녀와야 할 것 같구나. 아직은 '너를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너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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