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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중의 으뜸은 '세상살맛'

2023년 7월 28일 금 / 아이들에게서 팁을 얻다

by 글방구리

글쓰기 선생이 글쓰기 주제로 사심을 채우면 안 되지...라는 법은 없다!

'막바지 장마에 날씨는 꿉꿉하죠, 돈 십만 원 들고나가도 장바구니 안에는 몇 개 못 넣죠, 뉴스는 안 보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만큼 답답하죠, 하다 못해 기대했던 드라마는 예상보다 별로죠, 커피 한잔 술 한잔 마시자는 사람 없죠, 게다가 오십견은 언제 나으려는지. 도무지 세상 살맛이 없네.'가 아이들을 만나기 전 나의 상태였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도대체 어떤 재미로 세상을 살고 있니?라고.


"지금 읽어준 글은 어떤 아이가 '세상 살맛은 이야기다'라는 주제로 쓴 글이야. 이 글을 쓴 아이는 친구들이랑 수다 떤 이야기를 자세히 썼더라. 이야기하는 맛으로 세상을 산다네? 너희는 요즘 무슨 재미로 사니? 오늘은 그 이야기를 써보자."

덩치가 나보다 더 커다래진 고학년 아이들이라, 주제를 주고 나면 곧바로 시크한 반응이 따라 나온다. 그게 어떤 주제든 간에.

"저는 그냥 사는데요."

"먹고 자고 싸고 놀고. 그게 다 아니에요?"

웅성웅성.

여기에서 기선을 놓쳐버리면 그날 수업 분위기를 다시 잡기는 어렵다. 목소리를 낮추고 미션 하나를 더한다.

"그래, 세상 살맛이라는 건 내가 어떤 재미로 사느냐 하는 거니까,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겠지. 그런데 오늘 글은 서론, 본론, 결론의 형식이 반영되면 좋겠어. 자, 시작!"

적어도 장난스러운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그러나 서론, 본론, 결론이라는 게 어려운가 보다. 다른 예문을 들어 작성 요령을 다시 한번 설명했다. 벌써 뭔가 써 내려가는 아이도 있지만, 머릿속으로 궁리하는 아이도 있고, 옆의 친구와 소곤대며 의논을 하는 아이도 있다. 나도 아무 말 없이 같은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말이 없어지니, 아이들도 어느새 글쓰기에 몰입해 있다. 선생이 조용해야 아이들도 조용하다.


아이들은 지금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다. 한결 여유롭겠지.

(상략) 나는 그중에서 그림 그리기가 살 맛이 난다. 왜냐하면 첫 번째 이유는 그림을 그리면 성취감을 느낀다.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면 자랑스럽고, 엄마 아빠가 칭찬해 주실 때도 기분이 좋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재미있다. 그냥 내가 그림을 그릴 때, 또는 그림을 볼 때 재미있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내 꿈이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직업 걱정이 일단은 없기 때문이다.(하략)

"오늘은 여기 오기 전에 만화책만 네 시간 봤어요."라고 했던 연우. 나는 연우가 만화책을 볼 때 살맛이 난다고 쓸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연우는 그림을 그릴 때란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눠 썼다. 연우는 여느 아이들처럼 자기가 잘하는 것에 대한 성취감, 부모의 인정과 칭찬이 필요해 보인다. 거기에 더해 그림을 그리면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갖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좋은가 보다. 연우가 절기 그림을 그릴 때는 더 격려해 주어야겠다. 미래의 직업에 대한 불안감이 엿보인다. "너 나중에 뭐 하고 싶어?"처럼, 미래의 불안감을 조장할 수 있는 말은 안 하는 게 도움이 되겠다.

나는 지금 졸리다. 그냥 졸리다. 이럴 때는 멍 때리고 싶다. 아까 종이배가 글 읽어줄 때도 멍 때렸다. 나는 힘들 때 멍 때리고 싶다. 그런데 잠을 자려고 하면 낮잠은 잘 안 온다. 학교 수업 시간에 수학시간에는 멍 때리는 시간이 반이다. 선생님이 설명하실 때는 멍 때린다. 다시 뭐라고 하면 한 다음에 다시 설명하면 멍 때린다. 멍 때리는 것도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간다. 학교 말고 다른 곳에서는 잘 멍 때리지 않지만 오늘은 여기에서 잠깐 멍 때렸다.(하략)

영어캠프에 다녀오느라 조금 늦게 온 재우의 글이다. 재우가 수업시간, 특히 수학시간에 멍 때리는 시간이 많다고 하니 의외였다. 내가 수업을 하면서 가끔 재미없는 문법 설명을 할 때도 있었는데, 재우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어려운 설명을 잘 들었다. 중간중간 멍 때리는 시간으로 세상 살맛을 느낀다니, 수업시간 중에 갖는 아이의 긴장감이 큰가 보다.


"그런데 얘들아, '멍 때린다'라는 말이 사실 비속어에서 시작된 거긴 해. 지금은 너무 익숙해졌지만. 그럼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뭐가 있을까?"

시현이 대답한다. "정신줄을 놓는다?"

"하하, 정신줄을 놓는다는 말도 교과서에 나올 법한 말은 아니지. 또 다른 말은 없을까?"

주하가 말을 받는다. "넋 놓고 있다?"

"오! 주하! 그래.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네."

"와, 뭐야, 나 지금 정답 말한 거야?" 까르르르.

내 수업에 빠지지 않고 오지만, 글쓰기보다는 함께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더 좋은 아이, 주하. 주하의 글을 읽으니 내가 주하를 제대로 보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나의 세상 사는 맛은 나와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단 둘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간 쌓여 있던 일들도 날아가고 이해를 잘해주면 말을 할 맛이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친구는 내 주변에 가끔 가다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나와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놀고 싶어도 친구들이 시간이 안 나면 나는 대부분 못 놀거나 다른 친구들과 논다. 그리고 친구들과 놀 때는 단 둘이서만 노는 게 좋다. 2명 이상이 되면 보통 2명씩 나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2명이 노는 게 좋다. 나는 처음 주제를 받았을 때 많이 고민했다. 딱히 사는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나도 세상 사는 맛이 많이 떠오르겠지?

자신을 '극강외향성'이라고 말하는 주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피구를 할 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오면 나서서 바꾸기보다 자기가 슬그머니 빠졌다. 언제나 밝고 즐거워 보이는 주하가 '딱히 사는 맛이 없다'라고 표현하는 걸 봐도 그렇고.


내가 요즘 너무 축구에 빠져 있다. 그 땀이 너무 뿌듯하다. 그러니 달리기가 맞는 것이다. 이 달리기를 할 때, 천천히 달릴 때 찜통을 느낀다. 하지만 빠르게 달릴 때는 많이 뜨겁지만 시원하다. 느리게 달릴 때 정말 정신이 나갔다 다시 들어온다. 꼭 깨어나고 찬물에 샤워한 그 느낌이다. 그런데 반면 빠르게 달리면 은근히 제정신이 나갔다 온 기분이다.(하략)

친구들보다 키가 작지만 누구보다 의젓하게 인사를 잘하는 지호. 수영도 좋아하고 축구도 좋아하는 지호의 근육은 제법 단단하다. "빠르게 달릴 때는 많이 뜨겁지만 시원하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목욕탕에서 온탕에 몸을 담그며 "시원하다~~~!!!"라고 하던 어르신들이 떠올랐다. 나는 뜨겁지만 시원하고, 힘들지만 재미있고, 어렵지만 쉬운 일이 있다는 걸 커서야 알았는데, 이 녀석이 벌써 깨달았던 말인가. 어쨌든 땀 흘리는 맛을 아는 아이의 글을 읽으며, 땀 흘리기를 피하며 여름을 나고 있던 내가 살짝 부끄러웠다.


나는 그동안 시현이가 너무 이것저것 많이 하느라 고단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을 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다니는 학원도 많아 보였다. 그런데 시현이는 세상을 사는 것이 너무 즐겁단다. 심지어 대회를 나가는 일이 즐겁단다.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은 힘들지만 긴장감을 짜릿하게 즐기고 있다는 거다. 시현이는 글에서 대회에 나가 좋은 결과를 얻고 싶은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의 욕심을 인정하면서도, 그 욕심이 채워지지 않아도 대회를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세상 살 맛이 난다니. 실패가 두려운 어른들이여, 시현이에게 배우시라.

나는 세상을 사는 것이 너무 즐겁다. 농구, 피구, 먹을 것, 낙서, 여행, 물놀이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대회를 나가는 일이 즐겁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대회를 나갔다. 피아노, 수영, 줄넘기 등 많은 대회를 나갔었다. 그런데 막상 대회 때는 긴장되지 않는다. 그런데 대회 전이나 후가 긴장된다. 대회 때는 영혼이 반쯤 나가고 뭔가 좀 짜릿하다. 영혼이 좀 나가도 그냥 몸이 습관처럼 움직인다. 그리고 그런 것을 추억하는 것이 즐겁다. 그러나 그 짜릿한 대회를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해 실력을 쌓아야 한다. 그 과정은 힘들지만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다. 난 그 시간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그 순간도 추억하며 즐거워한다.(중략) 앞으로도 대회에 자주 나가고 싶다. 그 경험을 추억하는 일이 내가 세상 살맛 나는 일이니까.

주제가 주어지자마자 가장 먼저 연필을 들고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던 율민이의 글도 궁금했다. 율민이는 MBTI의 'J' 성향이 틀림없다. 나도 계획 세우는 것을 즐거워하는 유형이다. 월말이 되면 다음 달 일정을 짜고, 그 주간 마지막 수업이 끝나면 그다음 주 수업 계획을 세운다. 저녁에는 일기를 쓰면서 다음날에 할 일을 촘촘히 적는다. 빨래, 식재료 주문처럼 늘 반복되는 집안일도 적는다. 심할 때는 '샤워'를 할 일 목록에 적은 적도 있다. 율민이 글을 읽으며 율민이와 급 가까워진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 아이에게는 되도록 다음 일정을 잘 알려주고,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아이들과도 '약속'한 것은 당연히 지켜야 하지만.

아~ 내일은 뭐 하지? 내일은 학원 갔다가 조금 쉬고 또 놀아야지. 음~ 내일은 조금 편하겠네. 내일 뭐 할지 생각하니까 벌써 기분이 좋은데. 다른 사람들은 게임하기 책 보기 같은 것을 많이 좋아하는데 나는 내일 뭐 할지 계획하는 게 가장 재미있는 것 같다. 내일 뭐 할지 계획하면 벌써 그 일을 하는 것처럼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일정이 생기면 실망감이 크고 조금 슬프긴 할 것 같다.(중략) 서프라이즈 파티 같은 예상치 못한 이벤트를 기대하는 맛도 있기는 하지만, 계획하는 게 훨씬 더 행복한 일이어서 다음날 뭐 할지를 오늘도 계획해야겠다.


서현이는 둘 중의 하나를 쓰리라 예상했다. 안유진 또는 마라탕.

"뭐 쓰지? 뭐 쓰지?" 어느 누구보다도 고민을 하는 것 같았던 서현이는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을 보는 낙으로 산다고 썼다. 내가 그랬다. 어릴 때는 만화영화를 보기 위해 일주일을 기다리고, 조금 더 커서는 '다음 이 시간에'로 끝나는 드라마의 후속 이야기가 궁금해 주말을 기다렸다. 텔레비전을 집에서 치우고 난 다음에는 [개그콘서트]가 업로드되는 월요일 저녁을 기다렸다. 서현이의 그 맘을 안다. 오프닝 음악이 나올 때 두근거림, 시작 전 광고가 길어질 때 느끼던 조바심까지.

곧 금요일이다. 나는 항상 금요일만을 기다린다. 금요일은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나오는 TV프로그램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바로 지구오락실이라는 프로그램이다. 8시 30분에 시작하는데, 혹시 시작을 못 보면 어떡하지 하고 8시에 TV를 틀어놓을 때도 있다. 진짜 요즘에는 지구오락실을 보려고 사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금요일에는 일정이 많을 때도 있다. 여행을 가거나 병원을 가거나. 한 번은 피부과에 들러서 진료가 8시 30분에 끝난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엄마와 함께 뛰어가서 40분쯤에 집에 도착해서 10시 40분까지 본 적이 있다. 내가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만큼 이 프로그램이 오랫동안 하면 좋겠다.

제법 서론, 본론, 결론을 맞춰 써보려고 애쓴 흔적들이 보인다. 자기 관심사와 재미를 적어 내려 간 아이들의 솔직함을 함께 소리 내어 읽다 보니 절로 힐링이 된다. 친구를 때리며 다투고, 먹기 싫은 반찬 앞에서 시무룩해지고, 한글이 어렵다며 자기 이름도 보고 베끼던 아이들이 참 많이 컸다. 잘도 자랐다. 아이들이 한여름 벼가 자라듯 쑥쑥 커가고 있다.

아이들 하나하나를 바라보다가, 다시다 광고 모델 김혜자 배우를 흉내 내며 말해 본다.

'그래, 이 맛이야! 이 맛이 세상 살맛이야.'

누구는 글로, 누구는 그림으로, 누구는 땀으로. 옳고 그름이 없는 각자의 길에서 각자의 재미대로 사는 거지. 완두콩 선생님이 그리는 그림을 보는 것도 세상 살 맛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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