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볕이 너무 좋아

2023년 10월 / 박노해 [걷는 독서]

by 글방구리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 난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Autumn sunshine is so good.
Quietly it dries me out.
My sorrows, my wounded desires,
my only too clearly visible days of life.

박노해 [걷는 독서] 546쪽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허리가 기역자로 꺾여가는 동네 할머니가

밭에서 따온 고추며, 고구마 줄기 같은 푸성귀들을 마당에 널면서 말했다.

"볕이 너무 아까워서."

가을볕은 무심히 보내버리는 볕이 아닌가 보다.

무어라도 내다 말리고 싶을 만큼 아까운 볕인가 보다.


밭에서 수확한 것이 없으면

나라도 꺼내다 널어놓아야 할 것 같은 볕,

슬픔도 말려주고, 상처 난 욕망도 감싸주어

살아온 날들을 투명하게 만들어 주는 치유의 볕인가 보다.


한가위 보름달이 뜨고 지면서 묵은 달이 가고 새 달이 왔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노래를 한 달 내내 입에 달고 살아도 되는 달, 10월.

올해 달력을 만들며 시인의 '가을볕이'를 썼던 걸 보면

작년에도 10월에는 볕이 좋았나 보다.

아무렴.

올해 이렇게 너그러운 가을볕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주시는 분이

작년이라고 인색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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