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제를 자기 걸로 만들어

2023년 10월 15일 / 주중식 외 [교사열전]

by 글방구리

일곱 살 아이들의 교육과정을 적은 글의 일부를 묶어 브런치북으로 만들었다.

어느 카페에 올려 공유하면서, 나의 '본캐'와 '부캐'에 대해 잠깐 망설였다.

내가 글쓰기 선생인가, 유아교사인가? 나무인지 풀인지 헷갈리는 대나무만큼이나 어정쩡한 위치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어떻든, 아직은 교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으니, 다른 교사들은 어떤 글을 쓰는지 배우자는 마음으로 며칠 전 선물받은 [교사열전]을 집어들었다. 그러다 항간에 돌아다니고 있던 '재미있는 초등학교 답안지'만큼이나 재미난 글을 만났으니!

아이들은 시험지를 받아 들자 진지하게 써 나간다. ...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종현이 시험지부터 찾아 들었다. 아주 걱정스런 반응을 보이던 놈이라 그 녀석 시험지가 제일 궁금했다. 그런데 걱정스런 마음과는 달리 첫 문제부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이런 시험 답안은 처음 본다.

- 부르는 말을 바르게 써 보세요. "발걸음도 가볍게"
(나는 안 가벼습니다.)

- 보기 문장에서 밑줄 그은 말을 높임말로 바르게 바꾸어 쓰세요.
<보기> "아버지가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빨리 오면 종켓습니다.)

- 다음에서 틀리게 쓴 말을 바르게 고쳐 쓰세요. "놉고 푸른 하늘"
(지금은 하늘이 꺼머습니다.)

갈수록 종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다 싶다. 모든 문제를 자기 걸로 만들어 자기 답을 쓰고 있다.
... 의사가 진찰하는 것하고 같다고 했던 말을 종현이는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모른다고 아무것이나 쓰지도 않고, 그냥 비워 두지도 않았다. 답 쓰는 괄호가 넘치도록 꾹꾹 눌러서 써 놓았다...

드디어 마지막 문제다.

- 사물을 셀 때 쓰는 말을 다음 보기에서 찾아 쓰세요.
나무 한(번만 올라 가)
연필 한(번 쓰께)
생선 한(번 먹자요)
운동화 한(200쯔 되요)

시험지를 매기면서 나는 오늘 종현이를 한번 안아 주지 못하고 보낸 것이 마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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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엮음/ [교사열전] 36-38쪽 / 박선미, 부산 신평초등(2005.3.9)


문제를 피하지도 않고 거르지도 않고 성실하게 자기 나름의 답을 찾아 쓴 노력이 느껴진다. 대다수의 교사는 종현이의 답에 빨간 줄을 그었겠으나, 글을 쓴 교사는 정답 너머 담겨 있는 종현이의 마음을 읽은 것 같다. 훌륭한 선생님!


모든 문제를 자기 걸로 만들어 자기 답을 쓸 수 있다면, 세상 살면서 어떤 문제가 다가온다고 해도 해결할 수 있지 않겠나. 모름지기, '문제'라는 것은 내는 사람 마음대로요, '답'이라는 것은 쓰는 사람 마음대로일 테니. 어떤 문제가 다가온다고 해도 내 식으로 풀면 된다고 종현이가 알려준다.


2005년에 씌어진 글이다. 글에 등장한 종현이라는 이 아이, 아마도 굉장히 멋진 30대를 살고 있을 거다.